⊙유신/한홍구/한겨레출판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군사독재와 싸우고 정보정치와 싸우고 공안검찰과 싸워온 것인데 이제 군과 정보정치와 공안검찰이 완벽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여기에 재벌과 수구언론을 더하면, 주권자인 국민을 밀어내고 자기들이 대한민국의 주인이라고 설쳐대는 민주주의의 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선출되지 않은 이들 권력에 대한 문민통제를 어떻게 회복하느냐는 한국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한국 현대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신간 '유신'의 서문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의 한국을 집중 조명한 이 책은 김대중 돌풍과 신민당 약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위협이 커진 1971년 대선·총선에서부터 1979년 10월26일 김재규에 의한 박 대통령의 죽음, 이후 전두환의 내란과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항쟁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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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5년부터 1973년까지 이뤄진 베트남 파병이 지금의 한국에 어떠한 영향으로 남아 있는지 한 교수의 시선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272쪽)
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됐는데, 1970년대의 사회사를 펼쳐 보임으로써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패러다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꼼꼼하게 짚어본다.
'강남 불패의 신화, 또는 부동산 투기란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의 성과를 특정 지역에 일정 규모 이상의 땅을 가진 자들이 빨대 꽂아 쪽 빨아먹어 버린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구 세력을 형성했다.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형제들이 그들을 너무도 부러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하, 우리 사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저렇게 돈을 벌었구나를 깨달으며 우리는 정의고 나발이고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갔다. 많은 젊은이들은 성실하게 살아온 부모들을 그때 뭐했느냐며 원망하기 시작했다. (323쪽)'
단순히 지나간 역사로서의 '유신'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신 체제'를 살펴본다는 데, 이 책은 남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5·18광주민중항쟁을 두고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 잔당과의 쌍움이었다'고 규정한 한 교수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광주는 끝났는가'라고 묻는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 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 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이런 상황이 고착되어버린다면 도청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죽음을 홍어 운운하며 모욕하는 벌레들이 아니라 이런 현실이 고착되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가 그들을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4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