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펀딩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열심히 살았다.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 가게도 냈다. 그 어렵다던 서울 아파트도 장만했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남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걸 갖췄다. 모든 게 와이프와 함께 성실하게 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소중한 생명이 우리 부부에게 찾아 왔다.

그런데 하람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제대로 기지도, 앉지도 못했다. 또래보다 행동발달이 많이 떨어졌다. 산부인과 검사 때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었는데. 우리는 아이가 세상을 조금 느리게 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하람이가 감기에 걸려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서 검사 받기를 권했다. 유명한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은 아이를 보자마자 평생 걷지도 못할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를 심각한 장애로 진단했다. 검사를 시작한 의사는 아이의 온몸에 바늘을 꽂았다. 근육의 반응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9개월인 아이는 울부짖었다. 며칠간 검사를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검사란 명목으로 아이만 괴롭힐 뿐이었다. 원인미상의 발달장애. 의사는 암울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우리 가족의 희망을 꺾어 놓았다. “당신이 신도 아닌데 우리 아이가 못 걸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을 하십니까? 두고 보세요. 제가 꼭 걷게 만들겠어요”

나는 의사에게 화를 내며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우리 하람이, 내 아이는 걸을 수 있다.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자주 다퉜다. 아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화를 내며 풀었다. 서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말수도 줄었다. 밖에선 애써 밝은 척했지만 집에서 우리 부부의 얼굴은 어두운 날이 많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열심히 살았다. 조금 느린 아이를 위해서 더 많이 움직였다. 내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둘째가 생겼다. 계획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임신 기간에 하는 특수검사를 하지 않았다. 초음파 검사가 전부였다. 그 흔한 양수검사도 하지 않았다. 비록 초음파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둘째의 신체발달 상황도 정상치에 있었다. 검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행여 검사결과가 안 좋으면, 우리가 이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하늘이 주신 선물을? 그리고 이번에는 하늘이 우리에게 첫째를 보살펴줄 수 있는 둘째를 주실 것으로 믿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한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게 일이 늦게까지 이어지던 그 날, 아내는 병원에서 출산 중이었다. 다행히 처형과 장모님께서 아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둘째. 공주님이었다. 나는 일을 끝내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향해 달려갔다. 신생아실 앞에서 유리창 너머로 공주님을 만났다. 너무 사랑스러운데 나는 직감적으로 공주님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보다 미간이 넓었던 것. “여보, 우리 아이가 다운증후군인 것 같아” 나는 입원실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와 장모님, 처형은 믿지 않았다. 어딜 봐서 다운증후군이라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반문했다. 마치 내가 첫째를 진료한 의사에게 했던 것처럼 가족은 둘째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아요” 간호사가 다급하게 알려왔다. 방금 내가 봤을 때만 해도 평온한 얼굴이었는데 청색증(무호흡 증상)이라니.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딸은 곧바로 산소마스크를 꼈다. 그리고 내 품에 안겨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옮겨간 대학병원에서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란 것을 확인해 줬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하니 충격이 컸다.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우리 부부에게.
도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했는데.
세상에는 우리보다 나쁜 사람도, 못된 사람도 많은데.
왜 우리에게...
정말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왜냐고.
왜 하필 우리냐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온 지 얼마 뒤. 인큐베이터로 들어간 아이는 호흡을 되찾았다. 간호사는 아이가 먹을 모유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부은 두 눈을 닦으며 산부인과로 향했다.
“아이는 괜찮대. 그리고 다운증후군이래” 장모님과 처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색하지 않지만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양가 모두 가족력이 없었기 때문에 둘째까지 장애아이라는 충격은 상당했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아내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내는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모유가 나오지 않던 아내를 대신해 다른 산모가 모유를 짜서 건네 줬다. 젖병을 들고 대학병원으로 갔을 때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젖병을 빨았다.

그날, 유난히도 비가 내렸다. 차마 아내가 출산한 산부인과 입구로 발걸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울었다. 빗소리가 내 울음소리를 감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절, 분노, 원망... 눈물이 쏟아졌다. 첫째의 발달장애 진단, 둘째의 다운증후군 진단. 세상이 야속하고 미웠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운증후군을 검색해 봤다. 중증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의 사진이 나왔다.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고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염색체가 하나 더 있음으로써 생기는 신체적인 이상. 다운증후군을 가진 가족의 어렵고 힘든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중 공통된 내용이 하나 있었다.

바로 천사였다. 유독 다운증후군 부모들은 아이를 천사로 부르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운증후군 아이는 인내심 많고, 주변을 잘 배려하고, 참을성도 많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사랑을 나눠 준다는 것. 그래서 다운증후군 카페 이름도 ‘엔젤맘’이었다.

그래. 천사가 온 것이다. 하늘에서 우리 부부에게 더 행복하고 사랑하라며 천사를 보내준 것이다. 그날 나는 우리에게 온 천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곁에 있던 천사의 오빠도 품어 안았다. 애써 아니라고 부정했던 현실을 인정하고 첫째 하람이의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나를 괴롭혔던 강박관념이 사라졌다. 이렇게 첫째의 장애 진단을 인정하기까지 딱 3년이 걸렸다. 그때 이후로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해졌다.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고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 아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바뀌자 아내의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고 웃음도 되찾았다. 쉽진 않겠지만 우리 가족은 당당하게 살아가기로 했다. 직업, 집, 생활. 우리 부부의 삶은 모두 아이들을 위해 재조정 됐다. 경제적으로는 더 힘들었지만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더 행복했다. 걸을 수 없다는 첫째 천사는 당당히 일어섰다. 지금은 한 번 들으면 그 음을 정확하게 맞추는 서번트(장애를 갖고 있지만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의 기질도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첫째는 나와 함께 기타공연도 한다. 우리 가족의 웃음을 담당하는 둘째 천사. 조잘조잘 둘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모두 날아간다. 딸이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두 명의 천사는 우리 부부에게 왔고 우리는 천사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인터뷰 : 최대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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