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산업단지 여천NCC 전경. 연합뉴스이란 전쟁 여파로 주요 원료 수송로가 사실상 차단되면서 국내 석유화학(석화) 업계의 위기 경보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석화 원료 제조사 여천NCC가 주요 고객사들에게 제품 공급 계약을 정상적으로 이행하기 어렵다고 통보한 데 이어 국내 석화업계 1, 2위 기업인 LG화학과 롯데케미칼도 유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했다.
플라스틱, 합성섬유, 고무 등 기초소재의 원천으로서 '산업의 쌀'로도 불리는 나프타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게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상황이 조금 더 길어지면, 석화 위기가 제조업 전반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수출 계약을 맺은 일부 제품에 대해 공급 불가항력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고객사에 최근 고지했다. 공급 불가항력이란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으로 제품 계약의 정상적 이행이 어려울 때 책임을 면제 받기 위해 하는 선언으로, 이 조치를 취할 수도 있으니 대비하라는 안내를 한 것이다.
롯데케미칼 역시 고객사에 최근 같은 조치를 했다. 이 기업은 고객사 공문에서 "원료 조달과 제품 운송 수단의 확보가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며 "공급 의무 이행이 불가피하게 지연되거나 곤란해질 경우 관련 사항을 신속히 안내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에 앞서 여천NCC는 가능성 언급을 넘어 공급 불가항력 선언을 지난 4일에 했다.
중동 사태를 거치며 이란이 나프타 등 중동산 석화 원료 핵심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을 사실상 막아서면서 국내 석화 업계가 연쇄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내로 수입되는 나프타의 절반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거친다. 업계에 따르면 다수 석화 기업들의 나프타 비축량은 1~2주 활용분에 불과해 각자 공장 가동률을 낮추며 대응 중이다.
한 관계자는 "한 달 안에 공급 불가항력 선언이 잇따를 수 있다. 이제 시작 국면"이라며 업계 위기 기류를 전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동 사태로 인해 한국 뿐 아니라 여러 국가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지금 원유 자체의 수급도 어렵기 때문에 국내에서 나프타를 자체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원유 정제로 나오는 나프타가 분해 설비(NCC)를 거치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핵심 원료가 생산된다. 이 원료들은 플라스틱과 고무, 포장·외장재 등 생활과 밀접한 기초 소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나프타 수급 차질이 장기화 되면 제조업 전반에 충격파가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정부도 이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업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 긴급 이사회에서 총 4억 배럴 규모의 비축유 방출 공동 행동을 결의하면서 한국 정부도 비축유 2246만 배럴을 방출하기로 했는데, 이 물량이 석화 업계 원료 생산용으로도 고루 번질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이번에 국제 행동 차원에서 방출하기로 결정한 비축유는 국내 시장에 단계적으로 풀릴 예정이라고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