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도발한 관세전쟁 초기, 전세계는 관세전쟁의 근원이 중국 견제에 있을 것으로 보고 스트롱맨 트럼프와 시진핑 중 누가 웃을 지가 관전포인트라 생각했다.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트럼프와 시진핑은 지금 모두 웃고 있다. 중국의 보잉항공기 500대 구매협상이 최종 단계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23일(현지시간) 외신에 보도된 것에서 보듯 미중 양국은 관세전쟁에서 벗어나 출구전략을 모색중이다.
반면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인 동맹국들은 울상 짓고 있다. 트럼프에겐 동맹의 가치는 안중에 없고 오직 힘의 논리와 장삿속만이 믿을 구석인 듯하다. 미국에서도 트럼프의 관세전쟁과 관련해 미국의 자유무역이 10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퇴보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최근 심경을 밝힌 것처럼 지금 미국은 10년, 20년 전에 알던 미국이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 편이 아니라는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를 강요한다.
마가가 쌓고 있는 2개의 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표방한 트럼프는 2개의 커다란 담을 쌓고 있다. 물자 교류의 담과 인적 교류의 담이다. 물자와 제조업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수입 규제에 나섰고 다른 한편으로 자국민 일자리 보호를 명분으로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시행중이다. 이 과정에서 나라별 1대1 관세협상은 투자를 압박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트럼프의 마가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단연컨대 아니라고 본다. 궁극적으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신뢰자본(Trust capital)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 등 소트프파워로 리더십을 인정받았는데, 지금 트럼프는 마음대로 정하고 갑자기 돌변하고 뒤집기 일쑤여서 종잡을 수 없다. 전통적 우방인 한미관계만 보더라도 겉으로 멀쩡해도 국민 정서를 감안하면 최악이다. 미국 조지아공장 한국인 구금사태가 국민감정의 버튼을 눌렀다.
관세협상에 연계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우리에게 주권과 안보의 문제로 다가온다. 외환보유고가 약 4100억 달러인데 미국의 현금투자 요구액은 3500억 달러에 달한다. '억'소리 난다는 말로도 부족한 한화 486조에 해당한다. 투자처는 미국이 정하고 원금 회수 전까지 이익은 5대5, 원금 회수 뒤에는 미국이 90%를 가져가겠다는 그림이다. 자금조달도 무리인데 회수 가능성 조차 불투명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타임지, 로이터 등 주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관세협상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 "3500억 달러를 모두 현금으로 미국에 투자한다면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면 미국측의 압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뉴욕을 방문중인 이 대통령은 23일(한국시간) 미 상하원 외교위 소속 의원들과 만나서도 상업적 합리성이 보장되는 투자방식과 비자제도 개선을 강조했다.
신뢰 자산의 상실은 미국에 안보를 기대는 것 자체에도 의심을 갖게 한다. 핵우산을 100% 신뢰하기도 어렵게 됐다. 미국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의 딘 베이커는 "주변국 군사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트럼프를 믿는다면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살 길 찾는 각국
연합뉴스트럼프의 관세전쟁은 세계 여러나라에 각자도생만이 살 길이라는 교훈을 발신한다. 중국은 그걸 파고들었고, 이 때문에 '미국은 실수하고 있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앙숙이던 중국과 인도가 최근 접근하는 것도 트럼프의 무리수가 낳은 반작용이다.
1억4천만원짜리 전문직비자(H-1B) 수수료 폭탄에 이어 개인 14억원, 기업은 28억원을 내면 영주권 비자를 신속하게 발급하는 골드카드 프로그램, 전자여행허가(이스타) 수수료 인상도 무척 트럼프스럽다. 미국은 이민으로 기술혁신을 이룬 나라라는 점에서 이민규제와 비자 수수료 인상은 미국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는 한국 경제에도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다. 지난 2분기 우리나라가 미국에 낸 관세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전인 지난해 4분기에 비해 47배나 수직상승했다. 현대차는 25% 고율관세로 실적 유지에 비상이 걸린데다 조지아주 합작 배터리공장 착공도 수 개월 지연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자세를 다잡아야 한다. 트럼프가 도발한 고율관세와 투자강요는 경제전쟁임을 직시해야 한다. 시간에 쫓기기보다 방향을 바로잡는게 우선이다. 굴복한다면 나라 곳간 열쇠를 넘겨주는 것 만큼이나 경제안보에 치명적이다.
트럼프의 변덕에서 벗어나려면 항구적인 해결책으로 외교다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무엇보다 정부는 국민을 방패삼아 당당히 협상에 임하고, 정치권도 국가적 도전과제 앞에서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자세를 보이는 게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