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미국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 회사)에서 미국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구금된 한국인 수백명이 조만간 석방되기로 했지만 재계는 이번 사태의 후속 조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동안 묵인되던 관행적 미국 출장 형태가 사실상 막혔기 때문인데 재계는 자체적으로 보완책 마련에 나서는 한편,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계의 숙원이었던 미국 비자 문제가 해결될지 주목하고 있다.
재계, 미국 출장 최소화…비자별 가능 업무 재검토도
8일 재계에 따르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내 주요 기업들은 기존 미국 출장 관행을 다시 점검하는 등 자체 보완책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에 협력사를 포함해 300명이 넘는 인력이 단속된 LG에너지솔루션은 임직원들에 대해 고객 미팅 등을 제외한 미국 출장 전면 중단을 지시했다. 현대차도 당분간 필수적인 업무 등을 제외하곤 미국 출장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일부 기업은 미국 비자별로 가능한 업무 범위에 대해 법무법인 등으로부터 다시 자문을 받고 그 내용을 본사와 협력사 등에 전달하고 있다
자체 보완책 마련에 나섰지만
재계에선 편법 비자 활용이 '고육지책'이었단 볼멘소리가 나온다.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전문직 취업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단기 상용 비자 (B1) 등을 발급 받아야 한다.
연간 H1B 비자 발급 건수가 8만 5천개로 제한된 데 비해 세계적으로 신청자는 5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1의 비자 거절 확률은 지난해 기준 27.8%이고, 매년 3월에만 지원할 수 있는 H-1B는 신청자 10명 중 1명도 합격하지 못한다.
이에 재계는 정부에 꾸준히 이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피력했지만, 정부가 이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관행이라도 해도 편법은 잘못"이라면서도 "기업들의 꾸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제대로 관심을 가졌는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다만 재계 일각에선 이번 사태가 '예견된 참사'였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비자 장벽'이 높아졌던 점을 감안하면 2기 정부도 비슷한 기조를 펼 것이란 전망이 있었고,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단기 출장시 ESTA(전자여행허가제) 활용이 문제가 된 사례가 있었지만 기업들이 '안이하게 대응'한 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한 재계 인사는 "올해 초부터 ESTA를 갖고 출장을 간 한국 기업 직원이 입국 거부되는 사례가 꾸준히 알려졌다"며 "지난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불법 이민 단속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하면서 입국 심사가 더 강화됐고, 일부 기업은 출장 관리 지침을 점검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ESTA나 B1과 달리 정식 취업비자는 발급 여부가 불확실한 것은 물론 받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려서 ESTA 등으로 편법 출장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엔솔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며
"관행이라도 해도 잘못인 점은 분명하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편법적인 관행을 바로잡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대미 비자 체계 점검"…트럼프 "대미 투자기업, 신속 입국케"
연합뉴스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미 정부의 무관심 속 20년 가까이 공전했던 미국 비자 문제가 양국 정부의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재계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진행되던 2006년부터 비자 문제 해결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했지만 20년 가까이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김종훈 당시 외교통상부 한미FTA 협상수석대표는 우리 기업인의 비자 면제를 한미FTA 협상 의제로 제안하겠다고 했고, 다음해 이혜민 당시 외교통상부 한미FTA 기획단장도 전문직 쿼터에 대해 "(FTA체결로 1만500개의 전문직 비자쿼터를 받은) 호주보다는 많이 받아야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비자 문제 해결에 대한 재계의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이를 얻어내지 못했고, 이후 최대 1만5천개의 한국인 전문인력 취업비자 E-4 신설을 위해 미국 내 입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해당 법안은 미국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계 일각에선 한국인 수백명이 구금되는 초유의 사태를 계기로 비자 문제 해결에 물꼬가 트일지 기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7일 "유사 사례 방지를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및 관련 기업과 공조 하에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비자 체계 점검·개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종원 산업부 통상차관보는 다음날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 등 대미 투자를 진행중인 기업들과 긴급 간담회를 연 후 기자들을 만나 "우리 기업들이 불이익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어떤 해결책과 대안이 있을지 관계부처인 외교부와 긴밀하게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7일(현지시간) 이번 사태가 한미 관계에 미칠 영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의에 "우리(미국)에겐 더는 갖고 있지 않은 산업이 많고, 전문가를 불러들여 우리 국민을 훈련시켜서 그들(미국인)이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나는 그들(한국)이 말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한 기업 관계자는
"재계의 꾸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비자 문제가 한미 정부 간 주요 의제로 논의된 적이 없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됐다고 본다"며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번 사태가 비자 문제 개선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비자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못할 것이란 회의론 속 이 문제가 어느정도 매듭지어지기 전에는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가 속도 조절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또 다른 기업 인사는 "그동안 관련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단기간 내 구체적인 대책이 나올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재발 방지책이 마련되기 전까진 대미 투자도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