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청년은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게 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빛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굶어죽기로 했던 마음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바뀌었다.
시각장애인 이시환(44)씨는 자신이 ‘하찮은 일’이라고 여긴 그 일로 새 삶을 찾았다. 그의 ‘청년 때 일기’와 현재 진행 중인 ‘제2의 인생 일기’를 들여다봤다.
■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대학 졸업하고 특채로 한 기업에 들어갔다. 컴퓨터를 통해 공장 자동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일이었다. 빛을 잃은 것은 25살 어느 날이었다.
“실험을 하다가 화공약품이, 생석회 가루가 눈에 확 튀어 들어갔어요. 각막에 화상을 입은 거죠.”
두꺼운 돋보기라도 쓸 줄 알았지만,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그는 세상을 포기했다.
“스스로 굶어 죽겠다고 생각했어요.” 80kg까지 나가던 체중은 어느 새 50kg까지 내려갔다. 몸도 마음도 황폐화됐다.
■ "나도 귀중한 일을 할 수 있다"실명 뒤 4~5년을 숨어 지낸 그가 밖으로 나온 것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누군가에 의지해 병원에 가기 싫었다. 시각장애인이 무료로 안마와 지압을 하는 교회를 찾아갔다. 몸이 편안해졌다.
“솔직히 안마를 하찮은 일로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안마와 지압을 받고 나서 바뀌었어요. 시각장애인도 남들에게 보람된 일을 할 수 있구나.”
대전 맹학교에 입학했다. 장학금으로 받은 30만 원으로 월세를 얻고 라면을 먹어가며 공부했다. 가난했지만 꿈이 있었다. 3년 뒤 졸업한 그는 안마시술소로 향했다.
“안마·지압원을 개업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어요. 안마시술소에서 두 달간 일을 몰아서 했어요.”
두 달 뒤 600만 원을 손에 쥐었다.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골목 한 귀퉁이에 1개의 침대를 놓고 ‘침사랑 안마지압원’을 열었다.
■ "손님들 얼굴 볼 때마다 희열 느껴요"그는 첫 손님을 잊지 못한다. 어차피 더 이상 손님이 오지도 않았다. 첫 손님이 ‘OK’ 할 때까지 안마와 지압을 했다. 녹초가 됐다. 다음날 그 손님이 다시 왔다.
“이튿날 못 일어날 정도로 열심히 했죠. 그래서 알게 됐어요. 터득하게 된 거죠. 어느 정도까지 안마를 해야 환자 분들이 괜찮은지”
땀과 정성이 담긴 안마는 금세 소문이 퍼졌다. 한 번 찾은 손님은 다른 환자를 데리고 왔다. 침대 1개는 10개까지 늘었다.
■ "시각장애인이 왜 그렇게 월급이 많아?"‘침사랑 안마지압원’에는 1급 시각장애인 22명이 함께 일한다. 10명은 안마지압원에서 일하고, 12명은 출장을 다니며 몸이 아픈 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본다.
비장애인은 아르바이트로 1명을 두고 있다. 그는 ‘일반 사람’은 고용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은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는데, 시각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가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도 더 많은 시각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서다. 600여 개의 음악이 그때그때 신호를 보내준다. 환자들의 상태와 지압 시간 등을 그들만의 신호인 음악으로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하루 6~7명의 안마지압을 하는 직원들은 한 달에 250~300만 원을 받는다.
“어느 분이 그러더라구요.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못 받는데 시각장애인한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냐. 그래서 따졌죠. 시각장애인은 50~100만 원만 받습니까? 잘못된 사회인식인 것 같아요.”
■ "아이들도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어요"이곳에는 대전 맹학교 학생들,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와 지압을 배우고 있다.
많지 않은 학생들. 그가 그들을 붙든 것 마음이 편치 않아서다. 맹학교를 졸업한 앳된 아이들이 안마시술소로 가는 것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혼자만의 외침’이라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안마원을 개업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어요. 20살도 안 되는 아이들인데 저라도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죠.”
이시환 원장은 빛을 잃기 전 그 때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고 했다. 그는 그 때를 잊어버리기 보다는 요즘 일에 의미를 찾는다. 안마라는 소중한 일을 찾아낸 제2의 인생이 즐겁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