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범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18일 오전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건설업자 윤중천(53)씨의 고위층 성접대 의혹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
“성접대는 실제 있었다. 하지만 형사처벌은 미지수다.”
18일 경찰이 발표한 건설업자의 사회 유력층 성접대 등 불법로비 의혹 사건의 수사결과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경찰은 18명을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는 나름의 성과를 올렸지만, 정작 세간의 관심과 함께 사회적 공분을 산 ‘성접대 의혹’과 관련해서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입건하는 데 그쳤다.
◈ 소문만 무성했던 ‘별장 성접대’, 실제 어땠나?경찰청에 따르면 건설업자 윤중천(52·구속) 씨는 강원도 원주에 별장을 차려놓고 전·현직 공무원, 기업인, 교수, 병원장 등 각계 유력인사들에게 여성들을 붙여 성접대 등 향응을 제공했다.
건설공사를 따내기 위해 사실상 브로커로 나선 윤 씨는 마사지업주로부터 소개받은 여성 외에도 평소 지인을 통해 알고 지내던 일반인 여성들도 성접대에 동원했다. 경찰이 이 여성들을 조사한 결과 윤 씨로부터 성접대를 받은 인사들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포함, 10여명에 달했다.
경찰은 다만 성접대 당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별장에서 여러 여성을 상대로 이뤄진 일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서 처음에는 진술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며 “같은 내용의 진술이 여러 번 나오면서 보충됐기 때문에 수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성접대 과정에서 윤 씨가 여성들에게 마약이나 최음제를 투약한 것으로 보인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그러나 윤 씨와 성접대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남성, 일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마약류 검사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다.
◈ 2분짜리 ‘성접대 동영상’ 등장인물은 김 전 차관으로 확인사건 초기 언론을 통해 존재가 알려진 성접대 동영상은 엄청난 파문을 불렀다. ‘고위 공직자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다른 동영상들이 있다’는 등의 여러 소문이 퍼지며 유력 인사들의 부적절한 성추문에 대한 비난도 커졌다.
경찰은 실제로 같은 장면을 찍은 3개의 동영상 파일을 확보했다. 지난 2006년 8~9월에 윤 씨의 별장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동영상은 한 남성이 노래를 부르며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내용이다.
경찰은 피해 여성, 또 별장에 출입한 관련자들의 진술과 동영상 화면 및 목소리 분석 등을 토대로 동영상에 등장하는 남성이 김학의 전 차관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동영상은 윤 씨가 여성 사업가 권모(52) 씨로부터 빌린 벤츠 승용차에 보관됐다가 윤 씨의 부탁으로 차량을 회수하던 남성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경찰은 이들로부터 동영상을 압수했다.
차량 회수를 주도한 박모(58) 씨는 별장 동영상 외에 한 피해 여성에게 성적 피해를 증언하는 동영상을 찍도록 한 뒤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김 전 차관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 성접대 의혹, 사실로 드러났지만 형사처벌은 쉽지 않을 듯문제는 성접대 의혹과 관련해 당사자들을 처벌할 수 있느냐 여부다. 사건 초기부터 성접대의 대가로 오간 각종 청탁 등을 밝혀내지 않으면 성인들의 ‘성관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경찰 역시 처음부터 성접대를 받은 것으로 지목된 김 전 차관 등에게 뇌물수수 등의 혐의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사결과를 발표한 이날 수사팀 관계자는 “대가성 여부가 확인 안 되는 건 알았지만 의혹 해소 차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며 “수사를 계속 하다보면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4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윤 씨와 김 전 차관에게 일부 여성들의 의사에 반한 성적 접대 행위를 강요했다는 정황을 들어 옛 성폭력처벌 및 피해자보호법의 특수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동영상이 찍힌 지난 2006년 당시 사건 청탁 등과 관련된 둘의 대화를 들었다는 일부 여성들의 진술이 있긴 했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데다 다른 물적 증거는 하나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피해 여성들의 진술에 의존한 터라 실제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더라도 유죄로 인정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동영상 자체는 성접대가 실제 이뤄진 정황을 보여줄 뿐, 김 전 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을 넘겨받은 검찰이 김 전 차관을 기소할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검찰은 경찰이 강제수사를 위한 영장을 신청할 때마다 특수강간 혐의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 역시 “김 전 차관에 대한 범죄 사실은 여자들과 정리가 되면 풀릴 가능성이 높다”며 형사처벌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김 전 차관의 변호인은 “김 전 차관은 성접대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혐의를 부인하면서 “(접대를 했거나 받았다는) 당사자도 아닌 제3자의 말을 들었다는 전언(傳言)을 근거로 입건하고 이를 언론에 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