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톤 완주 메달만 50개가 넘는 15년 차 러너 이욱재(41)씨에게 달리기는 곧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그 긍지가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민폐'라는 지적에, 욱재씨는 이제 뛰면서도 "죄송하다"고 말하며 눈치를 봅니다. 가끔은 달리기가 취미라는 사실을 숨기기도 하고요.
1천만 러너 시대.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단기간에 급증하고 있지만, 대회 검증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5년 새 급증한 마라톤 대회…문제는 '허술한 검증' 구조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열린 국내 마라톤 대회는 254회로, 2020년 19회에 비해 13배가량 급증했습니다. 참가자도 4년 새 약 9천 명에서 약 100만 명으로 10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덩달아 시민 불편도, 사고도 늘었습니다. 서울시 마라톤 관련 교통 민원은 2021년 15건에서 2024년 461건으로 폭증했습니다. 마라톤 대회 관련 사고 역시 2020년 5건에서 2024년 72건으로 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요.

상권 피해도 적지 않습니다. 마포농수산물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마라톤을 이쪽에서 하면) 시장에 손님들이 들어오지를 못하니까 피해를 많이 입는 편"이라며 "매출이 절반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고 하소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불편을 겪는 상황이 반복되는 배경에는 허술한 검증 구조가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 신청하기만 하면, 사실상 누구나 마라톤을 열 수 있습니다. 지자체는 주최 측이 안전관리계획서만 제출하면, 별도의 검증 없이 공문을 내어줍니다. 주최 측이 해당 공문을 경찰에 제출하면 별다른 제동 없이 교통 통제 허가가 내려집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주최 측의 안전 관리 역량이나 대회 운영 경험, 지역 수용성 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현행법상 안전관리계획서 제출 여부만으로 실효성 있는 제재를 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라톤 대회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참가비를 가로챈 이른바 '먹튀 마라톤'부터 공사 중인 장소를 마라톤 코스로 지정한 이른바 '공사판 마라톤'까지. 지난 14일에는 '서울한강울트라마라톤'이 서울시와 동대문구의 승인 취소로 대회 이틀 전 갑작스레 취소되면서 또 한 번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서울시가 지난 1월 '시 주최·후원 마라톤 대회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출발 시각을 오전 7시 30분 이전으로 앞당길 것 △장소별 적정 인원 준수 △소음 65㏈(데시벨) 이하 관리 등의 기준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마저도 역부족입니다. 서울시가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대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죠. 그 밖의 대회에 대해서는 지자체가 '민간 주최'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수익은 늘고, 검증은 허술…책임은 누가 지나요?
주최 측과 지자체가 마라톤 대회로 인한 시민들과 상인들의 불편을 줄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배경에는 경제적 유인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최 측은 참가비를, 지자체는 장소대여비를 수익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최 측은 참가자 1인당 5~10만 원의 참가비를 받아 최소 5억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둡니다. 지자체도 마찬가지인데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상식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서울시는 마라톤 대회 장소 대여비로 약 15억 원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전문가들은 마라톤 대회가 현행 응급의료법상 공공재(응급의료 인력 등) 투입이 의무인 '대규모 행사'에 해당하는 만큼, 지자체나 정부 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검증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박성배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는 "지자체 차원에서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는 마라톤 대회는 허가를 하지 않는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게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미국 보스턴이나 뉴욕의 경우 '참가 규모', '교통 통제', '시민들의 반감' 등을 체계적으로 점수화 시켜서, 일정 점수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라톤 대회 주최를 허가하지 않는데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보스턴의 경우, 마라톤 코스와 관련된 지방정부와 공공안전 당국이 교통·안전·응급의료·지역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대회 허가 여부를 결정합니다. 뉴욕시 또한 행사 허가 온라인 신청 시스템인 'E-APPLY'를 통해 제출받은 서류를 토대로 경찰, 교통부, 소방, 지역위원회 등 다양한 기관이 심사에 참여해 행사 개최 여부를 결정하고 있고요.
'민폐' 아닌 '기회'로 만들려면…"질적 성장 고려할 때"
일각에선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마라톤 대회를 단순한 '민폐'가 아니라 지역과 상생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박 교수는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에게 쿠폰이나 할인권을 주고, 지역 상인들과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또한 수준 높은, 지속 가능한 마라톤 대회를 만듦으로써 도시 마케팅 혹은 도시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양적 성장'을 이룬 마라톤 대회, 이제는 '질적 성장'을 고민할 시점이 됐습니다. 15년째 뛰고 있는 욱재씨는 러너도, 시민도, 상인도, 민간단체(주최 측)도, 지자체도,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마라톤 대회를 여전히 꿈꿉니다.
"달리기 자체가 되게 좋은 거거든요. 다 같이 모여서 기운을 받고 좋은 기운을 이렇게 보여주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문화. 그런데 장점들이 많이 희석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과도기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지속 가능함에 대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자세하고 생생한 내용은, 유튜브 <씨리얼> 채널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마라톤 대회 민원이 30배나 늘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
https://www.youtube.com/watch?v=WtQSsUQxz8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