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입구에 차량 5부제 실시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원유에 대한 자원안보 위기경보가 '주의' 단계로 격상된 가운데 25일 0시를 기해 공공부문 '승용차 5부제(요일제)가 시행된다. 공공부문은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고, 민간은 자율 참여를 권고하는 방식이다. 류영주 기자중동 사태 장기화 조짐에 정부가 '차량 5부제 단계별 시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기존 공공부문 5부제를 강화하고, 사태가 악화될 경우 민간 부문까지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4일 국무회의 보고와 별도 브리핑에서 차량 5부제를 포함한 생활 속 에너지 절약 행동 12가지에 대한 국민 참여를 호소했다. 산업계에는 석유 다소비 사업장을 중심으로 에너지 절감 계획 수립을 주문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산업 부문에 도입 예정인 계절·시간별 전기요금제의 가정용 확대 적용과,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 경로우대 제한 조치 검토를 지시한 상태다.
에너지 수요 억제 필요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로, 전문가 일각에서는 강력한 수요 억제책이 시행될 경우 '석유 최고가격제' 중단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의' 발령 속 5부제 시행…경계 단계 땐 민간 확대
기후부 등에 따르면 25일 0시부터 강화된 공공부문 차량 5부제가 시행됐다. 경차와 하이브리드 차량도 예외 없이 적용되며, 전기·수소차와 장애인·임산부·미취학아동 동승 차량을 제외한 10인승 이하 승용차는 차량번호 끝자리 기준으로 주 1회, 월 4회 운행이 제한된다.
이번 조치로 약 1020개 공공기관과 국공립 초·중·고교, 대학 등 약 2만 개 기관의 공용 및 임직원 차량 약 150만 대가 운행 제한 대상에 포함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하루 약 3천 배럴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공부문 차량 5부제는 자동차 번호판 끝번호를 1~5, 6~0 두 조로 나눠 월~금요일 운휴일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차량이 주 1회, 월 4회꼴로 운행 제한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자원안보 위기 경보에 따른 공공기관 승용차 5부제(요일제) 시행지침' 캡처
민간 부문까지 참여할 경우 대상 차량은 약 2370만 대로 늘어난다. 우리나라 하루 연료용 석유 사용량 약 132만 배럴 가운데 수송 부문이 절반을 차지하고 이 중 절반이 승용차인 점을 고려하면, 승용차가 전체의 약 4분의 1을 소비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월 4회 운휴 시 한 달 기준 하루치 석유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5부제의 실질적 효과는 민간 동참 여부에 달렸지만, 정부는 시민 불편을 고려해 우선 공공부문부터 시행하고 민간은 자율 참여를 유도한다는 입장이다.
김 장관은 "원유 수급 차질이 본격화되는 '경계' 단계에서는 우선 공영주차장부터 5부제 차량의 진입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며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상황이 악화될 경우 민간 부문 의무 시행 가능성도 열어뒀다.
자원안보 위기경보는 관심-주의-경계-심각 4단계로 운영된다. 정부는 지난 5일 '관심' 단계를 발령한 데 이어 18일 '주의' 단계로 격상했다.
김 장관은 공공기관 5부제 시행 근거가 되는 '에너지 이용 합리화' 법 규정 적용을 받지 않는 대통령과 국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법원 등 헌법기관에 대해서도 "협조 요청을 하는 방식을 통해 사실상 공공기관에 준해 운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강화된 공공부문 5부제는 각 소속 기관을 대상으로 이행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고, 위반 시 경고 및 4차례 위반 시 징계하도록 하는 조치가 포함됐다. 기관 특성에 맞게 유연근무, 재택근무, 카풀(차량공유)도 권고한다.
김 장관은 '일반 기업에 유인책을 주면서 재택근무를 권고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경계 단계로 가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동 상황에 따른 에너지 절약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석유 다소비 업체 에너지 절감 계획 수립 주문…출퇴근 시간 조정도
하루 연료용 석유 소비량의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는 산업계에도 수요 억제 조치를 주문했다.
김 장관은 "석유류 사용량이 많은 상위 50개 업체가 전체 에너지 다소비 사업장 5156개의 91.4%를 차지하는 만큼, 이들 업체를 대상으로 에너지 절감 계획을 수립하도록 요청하겠다"며 "목표를 달성할 경우 에너지절약시설 융자사업 우선 지원 등 혜택을 부여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설명했다.
또 "출퇴근 시 차량 및 대중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해 교통 수요를 분산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과 대기업 등에 한시적 출퇴근 시간 조정을 독려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동할 때, 회사에서,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속 에너지 절약 실천을 위한 12가지 국민 행동을 선별했다"며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실천을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12가지 조치에는 '적정 실내 온도 유지하기', '전기차·휴대폰 충전은 낮 시간에 하기', '세탁기·청소기는 주말에 사용하기', '샤워 시간 줄이기', '불필요한 조명 끄기' 등이 포함됐다.
전자제품 낮 시간 사용 독려는 1990년대 실시한 '낮 2시~4시 전기 다이어트' 캠페인과는 대조적인데, 그 사이 주요 발전원으로 태양광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기후부는 태양광이 풍부한 낮 시간 전기요금을 낮추고, 전력 수요가 적은 봄·가을 주말 낮에는 전기요금을 '반값'까지 할인하는 계절·시간별 요금제를 내달 16일부터 대기업을 시작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에 적용할 예정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제공나아가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일반 가정용 전기요금까지 계절·시간별 요금제를 확대 적용할 가능성과,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 경로우대 제한 조치까지 검토할 것을 주문했다.
결국 중동 사태 장기화로 에너지 수급 우려가 심화될 경우 그만큼 강력한 수요 억제책을 시행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전문가 일각에서는 '석유 최고가격제'가 이 같은 대책과 모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경제학자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홍종호 교수는 "5부제가 나온다는 것은 석유 가격이 쉽게 내려오지 않고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신호인데, 석유 최고가격제는 자동차 이용을 늘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며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부제와 같은 강력한 수요 억제책이 시행될 경우 생계형 운전자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갖는 석유 최고가격제는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환경·에너지 전문가도 "최고가격제가 전쟁 초기의 일시적 대응이었다면, 차량 부제는 실질적인 에너지 절감 효과가 있는 정책"이라며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수요 억제 중심으로 가격 신호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전 가동률 높이고 석탄발전소 폐지 연기도 검토
이번 에너지 대책에는 공급 부문 대책도 포함됐다. 전기요금에 큰 영향을 미치는 LNG(액화천연가스)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원전과 석탄 발전 가동을 확대한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중동사태 경제대응 TF'는 지난 16일 기후부를 포함한 관계부처와의 당정 협의에서 당시 약 60%(전체 26기 중 15기) 수준이던 원전 가동률을 80%까지 높이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튿날인 17일 신월성 1호기가 정기검사를 마치고 재가동에 들어갔고, 지난해 11월 수명연장 허가를 받은 고리 2호기도 이르면 이달 말 재가동될 예정이다.
아울러 김 장관은 "한울 3호기와 한빛 6호기, 월성 3호기가 5월 중 가동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원호 원자력안전위원장도 지난 18일 고리 1·2호기 현장 점검에서 "정비 기간을 일부 조정하거나 시작 시기를 늦춰 가동률을 80%로 높이는 것은 설비 상황과 연료 교체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안전에 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부산 기장에 위치한 고리 2호기는 지난해 11월 원자력안전위원회로부터 수명 연장 허가를 받아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내달 초 재가동에 들어간다. 연합뉴스석탄발전 역시 최대한 가동하고, 일부 폐지 일정 연기도 검토한다. 김 장관은 "석탄발전은 미세먼지 계절관리제 기간에는 가동률을 80%로 제한하지만, 영향이 적은 시기에는 필요에 따라 100% 가동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올해 폐지 예정인 석탄발전소 3기도 필요할 경우 폐지 시점을 연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일일 평균 발전용 LNG 소비량 6만 9천톤 중 최대 20% 수준인 약 1만 4천톤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김 장관은 설명했다.
다만 원전 가동 확대에 대해 환경단체 반발이 예상되고, 석탄발전소 폐지 연기는 2040년 탈석탄 정책과 충돌할 수 있어 논란도 예상된다.
한편 김 장관은 "근본적으로는 석유와 LNG 수입을 줄일 수 있도록 재생에너지 보급을 최대한 빠르게 확대하겠다"며 "올해 재생에너지를 약 7GW 이상 보급해 2025년 기준 37.1GW 규모를 44.5GW까지 확대하고, 에너지저장장치(ESS)도 1.3GW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대책은 에너지 절약 중심의 단기 대응이지만, 대외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도 병행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