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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악몽 떠올라"…12·3 계엄이 파괴한 시민들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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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겨우 몇 시간 평화적으로 진행된 계엄을 내란이라고 볼 수 없다." '내란 수괴' 혐의 피고인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자기 변론적 궤변이다. 12·3 내란의 상흔은 사회 곳곳에 선명하다. 40여 년 전 광주의 트라우마를 다시 끌어냈고, 군·경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는 민주주의와 국가 시스템 전반을 위협한 '실제적 내란'이었다. CBS노컷뉴스는 12·3 비상계엄 1년을 맞아 그날의 상처를 다시 추적한다. 내란의 후폭풍은 끝나지 않았고, 누구도 그것을 '평화'라는 말로 가릴 수 없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12·3내란 1년]
'평화적 계엄' 망언 뒤 상흔들①
5·18 생존자 위경종씨…계엄군에 체포돼 상무대 영창에 구금
12·3 계엄에 "광주 무장한 공수부대 떠올라…용서할 수 없는 일"
당시 사진기자 나경택(77)씨 "평화적 계엄이 어딨나" 반문
3일 밤 국회로 달려갔던 청년들…"실체적 공포 느껴"
일상 파괴·사회 분열…"계엄 피해 완전히 회복 안돼"

12·3 비상계엄 당시 군인들이 국회로 투입된 모습. 박희영 기자12·3 비상계엄 당시 군인들이 국회로 투입된 모습. 박희영 기자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 위경종(66)씨의 기억은 45년 전 악몽으로 빨려 들어갔다. 5월의 광주, 금남로에서 무참히 짓밟히던 시민들, 몽둥이를 든 계엄군을 피해 걷고 또 걸어 도망쳤던 며칠, 상무대 영창에 갇혀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그때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 25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위씨를 만났다. 위씨는 당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총학생회장이었다. 위씨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평화적 계엄"이란 황당한 주장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1980년 봄, 광주 대학가는 뜨거웠다.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횃불을 들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불탔던 '서울의 봄'이었다.

죽음의 고비 넘겼던 학생회장…계엄으로 소환된 '5월의 기억'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12월 3일 밤 윤 전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에 위경종씨는 꾹 억눌러왔던 기억의 빗장이 풀려버렸다. 그날 5월의 광주.

5월 18일 일요일, 군화에 총을 든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됐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야영 훈련을 하고 있던 위씨는 CBS라디오로 계엄 확대 소식을 들었다. 학생회장 신분이던 위씨는 "밖에 나오면 너는 죽는다"는 동료들의 말에 친구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위씨는 당시 광주역에서의 발포 소리를 들었고, 전남도청 앞에 모인 수많은 시민을 봤다. 광주를 빠져나가던 그는 끝내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온다'의 배경이 됐던 광주교도소 안 창고로 끌려갔다. 수사관의 한마디에 위씨는 얼어붙었다.

"야, 사범대 학생회장이 누구야?"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 자유관에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참상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돼있다. 김수정 기자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 자유관에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참상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돼있다. 김수정 기자이후 상무대 영창(현 5·18 자유공원)에서 지옥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고문의 고통이 위씨를 잠식했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세운 '정자세'로 백 명이 넘는 구금자들이 좁은 방 안에 다닥다닥 붙어 지내는 것 역시 괴로웠다.  

8월 중순의 어느 날, 위씨는 면회장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머리칼이 다 빠져버린 어머니.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삼 남매를 키워냈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 3개월째 소식도 없이 사라진 아들을 찾아 헤맨 시간이 어머니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위씨는 "몇 달 전 봤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때의 기억에는 잠금장치가 걸려 있다. 87년이 돼서야 전라남도교육청으로 발령받아 교단에 섰지만,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위씨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다 피했다"고 회상했다. 수감 시절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위씨가 5개월간 구금됐던 상무대 영창을 복원한 모습.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에는 상무대 군사법정과 영창이 복원·재현돼 있다. 김수정 기자위씨가 5개월간 구금됐던 상무대 영창을 복원한 모습.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에는 상무대 군사법정과 영창이 복원·재현돼 있다. 김수정 기자가슴 속 단단히 잠가놓았던 빗장을 푼 건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그날의 두려움과 수치심,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등 수많은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우리 세대에게 계엄은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모든 게 한 사람의 권력으로 좌지우지되는 악몽과 같아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인권을 철저히 말살하는 거죠."

윤 전 대통령의 계엄에 대해 위씨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계엄 선포 직후 밤 11시부터 "시청으로 모여달라"는 문자를 받았다. 광주시장과 시민사회 대표, 종교 지도자 모두 시청 상황실에서,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4시간밖에 안 한 평화적 계엄"이란 윤 전 대통령의 궤변. 위씨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몇 시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계엄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 본 사람한테 다시 죽으라는 것과 같아요.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섰을 때의 그 장면, 광주 시민들에게는 흰띠를 두르고 착검한 채 무장한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온 공수부대를 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카메라로 기록했던 광주가 다시…"공포였다, 평화적 계엄이 어딨나"

"아빠! 5·18이 또 나버렸어." 지난해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된 밤, 나경택(77)씨는 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최루탄 냄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나씨는 당시 전남매일신문의 사진기자였다. 매일 전남대학교로 출근해 학생들의 외침을 카메라에 담았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오월기억저장소로 들어온 그는 취재진을 보자마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네모난 사진집을 꺼내 보였다.

전 사진기자 나경택씨가 직접 찍은 1980년 5월 광주의 사진. 젊은 청년이 곤봉을 든 계엄군에 붙잡혀 폭행을 당하는 모습.전 사진기자 나경택씨가 직접 찍은 1980년 5월 광주의 사진. 젊은 청년이 곤봉을 든 계엄군에 붙잡혀 폭행을 당하는 모습.그날 금남로로 뛰쳐나간 그는 뿌연 연기 사이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 공수부대가 휘두른 몽둥이에 쓰러진 시민들을 모두 지켜봤다. 나씨는 당시 전남일보가 있던 건물인 전일빌딩에 몸을 숨겨 5월 광주를 기록했다.

어느 젊은이가 끌려오면서 곤봉으로 맞는 장면, 페퍼포그차(안개를 분사하는 차량) 앞에서 청년들이 두들겨 맞는 장면, 부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돼 금남로에서 내려오는 장면. 광주의 처참한 상황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계엄 당국의 검열로 사진은커녕 신문 보도조차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나씨는 당시 전남매일신문 부국장, 사진부장과 논의해 AP통신 등 외신으로 몰래 사진을 보냈다. 며칠째 굶은 몸과 다리에 생긴 상처에서는 자꾸만 피가 났다. 점퍼 안에 망원과 와이드 표준 카메라 2대를 숨기고, 흑백필름을 주머니에 넣은 나씨는 현장을 지켰다.

25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전 사진기자 나경택(77)씨가 당시 5월 광주의 참상을 말하고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 25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전 사진기자 나경택(77)씨가 당시 5월 광주의 참상을 말하고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 "큰딸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였어요. 카메라를 놓고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고 싶었죠. 그렇지만 역사는 기록 아니겠습니까."

나씨는 "지금 세상에 어떻게 계엄을 할 수가 있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2월 3일 그날 밤 나씨는 집에서 아내 손을 꼭 잡고, 국회로 나간 시민들이 다치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공포스러웠죠. 평화적 계엄이 어딨나요? 일을 저질러 놓고 아무 일 없었으니 평화라고요? 강도가 칼을 들고 찌르려고 했는데, 안 찔렀으니까 죄가 없나요?"

나씨의 떨리는 반문이었다.

"비록 오늘 여기서 패배자가 될지언정 미래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다음 날 새벽까지 국회 앞을 채웠던 시민들의 모습. 김수정 기자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다음 날 새벽까지 국회 앞을 채웠던 시민들의 모습. 김수정 기자12·3 계엄은 누군가의 45년 전 트라우마를 다시 끄집어냈고,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렸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당시 국회로 달려 나갔던, 가장 생생한 피해를 목격한 시민 배강훈(30)씨와 김철규(26)씨를 만났다.

직장인 배씨는 그날을 "초현실적"이라고 표현했다. 근처에서 세미나를 하던 중 계엄이 선포됐다는 속보를 보고 본능적으로 국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계엄 선포가) 체감이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씨 역시 배씨와 함께 그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국회 현장을 지켰다. 김씨는 "오른쪽 문은 열려 있다"는 어느 시민의 말에 국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망국적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건 국회의원뿐. 그는 안에서 경찰들을 밀어내며 국회의원들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힘껏 손을 뻗어댔다.

현장에서 정신없이 "계엄 해제" 구호를 외쳤던 김씨는 며칠이 지나서야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그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광주 때처럼 됐더라면 나도 죽었겠구나라는 감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엄과 평화가 병치시킬 수 있는 말인지 묻고 싶어요. 모두가 장갑차를 보고, 총을 보고, 계엄군들을 마주하고 느꼈던 공포들은 실체가 있는 진실이었잖아요."
21일 서울 마포구에서 계엄 직후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 배강훈(30)씨와 김철규(26)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21일 서울 마포구에서 계엄 직후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 배강훈(30)씨와 김철규(26)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남성경 크리에이터계엄 이후 윤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통과, 이후 4월 4일 파면 선고까지. 몇 개월간 이어진 탄핵정국에서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탄핵 찬성과 반대, 사회가 양극단으로 쪼개지면서 갈등과 분열도 극에 치달았다.

배씨는 "주말마다 집회를 나갈 때 '왜 우리는 집에 갈 수 없을까'라는 의문이 항상 있었다"며 "파면이 될 때까지 광장에 모여야 하는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회상했다. 김씨도 "주변 대학원생들은 논문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졸업이 연기됐다고도 했다. 여러 친구들이 반년 동안 자신의 시계가 멈췄다고들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계엄 때문에 사회가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다. 다시 통합까지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점점 커지는 것인데, 이 역시 윤석열씨가 저지른 큰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12·3 계엄과 내란의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취재진이 만난 4인 모두 "계엄 사태로 인한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위씨는 5·18광장(옛 전남도청)에서 시민들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의 파면 선고를 보며, 윤상원 열사를 생각했다. 윤 열사는 1980년 광주에서 왜 이곳을 떠나지 않냐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비록 오늘 우리는 여기서 패배자가 될지언정 미래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고 답했다고 한다. 위씨는 "내란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무너졌던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지금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25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당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총학생회장 신분으로 계엄군에 체포됐던 위경종(66)씨를 만났다. 남성경 크리에이터25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당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총학생회장 신분으로 계엄군에 체포됐던 위경종(66)씨를 만났다. 남성경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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