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 연합뉴스"또다시 위헌·위법한 계엄이 선포된다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공직자가 있을까"
12·3 비상계엄 사태는 공직 사회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공직 사회는 상급자가 정책적 결정을 내리면 하급자가 실무적으로 그것을 이행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명령'과 '수명'이 수없이 이뤄지는 셈이다.
명령의 힘은 '권한의 크기'에 비례한다. 하급자의 인사와 부서의 예산을 좌우할 권한을 가진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급자의 명령이 가지는 힘은 법적으로도 보장된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공무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비상계엄 사태는 이 같은 공직 사회가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국회의 계엄해제 의결을 막으려 한 계엄군과 경찰들,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전파한 소방 공무원 등은 그동안 해오던 대로, 현행법에 따라 명령을 이행한 이들이다.
상급자 명령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물론 우리 법원은 그동안 '위법한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해왔다.
| ▶ '위법한 명령은 거부' 대법원 판례들 |
"무릇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소속 상관의 직무상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할 의무는 있으나 명백히 위법한 명령에 대해서까지 복종할 의무는 없을 뿐 아니라…"(대법원 80도306)"
"공무원이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상관은 하관에 대하여 범죄 행위 등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할 직권이 없는 것이며…"(대법원 87도2358)
"상관의 적법한 직무상 명령에 따른 행위는 정당행위로서 형법 제20조에 의하여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할 것이나,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 범죄 행위를 한 경우에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하여 부하가 한 범죄행위의 위법성이 조각될 수는 없다"(대법원 96도3376) |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고(故)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 범행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명백히 위법한 명령에 대해서까지 복종할 의무는 없다"고 판시했다.
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직원들도 같은 주장을 했으나, 대법원은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가하라는 등과 같이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는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고 판단했다.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대법원 판례 역시 같은 취지다. 군인들이 故 정병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과 故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한 것은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서 범죄 행위를 한 것이므로 정당하지 않다"고 했다.
계엄이 선포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서 군인들이 국회 관계자들과 충돌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복종 의무' 76년 만에 사라지지만…실효성 의문
문제는 이러한 법원 판결은 위법한 명령을 따르고 난 다음에 내려지는 '사후 평가'라는 점이다. 명령을 당장 이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하급자로선 위법성을 판단할 여유도, 명령 거부에 따른 불이익을 방지할 안전 장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이에 정부는 위법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기로 했다. 인사혁신처가 지난달 25일 입법예고한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에 따르면 법 57조에 있던 '복종의 의무'가 삭제된다. 대신 소속 상관의 '지휘·감독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며, 상급자와 하급자가 서로 '협력'하도록 규정했다.
특히 '공무원은 소속 상관의 지휘·감독이 위법하다고 판단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이에 따르지 아니할 수 있다'는 이른바 '명령 거부' 조항을 마련했다. 위법한 명령을 거부한 공무원에게 불이익을 제공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장치도 뒀다.
공직 사회에선 반기는 분위기지만 실효성에 의문을 갖는 시선도 있다. 상급자의 명령이 더 큰 힘을 갖는 공직 사회의 구조나 풍토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의제기권 보장하지만…'항명' 논란은 현재 진행형
전문가들은 일찌감치 공직 사회의 경직된 의사 결정 구조를 문제로 지적해왔다. 건국대학교 법학연구소가 발행한 학술지에 실린 '공무원의 복종의무와 그 한계'(우미형) 논문은 독일 연방공무원법에 있는 '이의제기 제도'를 소개한다.
독일 연방공무원법 역시 공무원은 직무상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명령의 합법성이 의심되면 상관에게 그 점에 대해 주장하도록 하고, 그럼에도 명령이 유지되면 더 윗선에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고 있다.
논문은 "독일에서 이의제기 절차를 활용하는 공무원은 매우 드물다"면서도 "상관과 수명 공무원이 상호 간 신뢰를 바탕으로 언제든지 명령의 실체적 내용과 공익 합치성 등에 대해 상호 비판적으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사혁신처 역시 독일 제도를 참고해 개정안에 '지휘·감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다만 상급자와 하급자가 실질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풍토가 자리 잡기 위해선 적잖은 어려움이 따를 전망이다.
하급자가 명령의 위법성 여부를 명확하게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도 한계로 거론된다.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포기' 과정에서 검찰 지휘부는 일선 검사들에게 "항소 여부를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일각에선 이러한 지시를 두고 "검사의 상소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명령"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시 자체는 '재검토'라는 외관을 띠고 있고, 항소 포기는 일선 검사들이 직접 결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휘부의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비상계엄 역시 시간이 너무 짧아 명령이 불법인지 아닌지 판단할 여유가 없었던 공무원도 많다"며 "하급 공무원들이 위법 여부를 적극적으로 판단하기도 어렵고, 애매한 상황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항명으로 처벌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