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여당은 물론, 정부 관계부처도 '배임죄 폐지' 입장을 확정짓고, 대체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경영계는 모호한 법 규정에 제약받던 경영 행위에 날개를 단 결정이라며 반색하고 있지만, 시민사회에서는 기업의 부정행위·부패를 막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없앴다며 비판하고 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30일 '형법상 배임'죄를 폐지하고, 이를 대체할 법안을 새로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1953년 첫 제정 이후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형법에서 배임죄가 사라질 상황에 놓였다.
폐지 이유를 놓고 당정은 과도한 경제형벌이 기업 혁신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7월 이재명 대통령도 같은 논리로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주문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이날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생 경제와 국가 경쟁력, 미래 성장을 위한 선택"이라고 강조했고,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업 경영 활동을 옥죄는 요인으로 지목된 배임죄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선의의 사업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배임죄 폐지'는 경영계의 오랜 숙원 사업 중 하나다. 경영계는 배임죄 구성요건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경영 도중 판단을 내릴 때마다 '이것도 배임죄로 걸리는 것 아닌가' 불안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법원과 수사기관이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자의적으로 적용해 법정으로 끌고 가곤 한다고 비판한다.
또 배임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5억~50억 원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형량 수위도 해외 사례나 다른 범죄에 비해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에 따르면 2014~2023년 10년간 배임·횡령죄의 1심 무죄 비율은 6.7%로 전체 범죄 무죄율(3.2%)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이는 법조문에 적힌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 ' 손해를 가한 때' 등과 같은 요건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아직 실제 손해가 일어나지 않아도 손해를 가할 '위험'만 있으면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법무부도 최근 배임죄 판례 약 3300건을 분석한 결과,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배임죄로 의율하기 때문에 경영자로서는 어떤 행위가 배임에 해당하는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봤다.
분석 결과 약 3300건을 32개 범죄 유형으로 나뉘었는데, 이 가운데 기업 임직원이 회사 자금이나 재산을 '사적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42.7%로 절반에 가까웠다. 이어 납품대금, 용역수수료, 경비 등을 과다하게 책정해 계약(10.5%)하거나 회사의 중요 기술, 영업비밀, 정보를 유출하는 행위(9.4%) 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법무부는 배임죄가 공공 영역 및 민사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고, 배임죄를 저지르는 주체인 '타인의 사무처리자'의 유형도 다양하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과 무관한 민생 분야, 사업기회 유용・가상화폐 범죄 등 새로운 경제범죄 유형에도 배임죄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고 짚었다.
당정이 배임죄 폐지 입장을 확정짓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향후 규제 개선의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반겼고, 대한상의도 "기업 의사결정 과정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반면 배임죄 폐지 소식에 시민사회는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시민단체들은 애초 배임죄가 경영상의 판단까지 과도하게 처벌한다는 주장은 허구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법 조항에 구성요건을 세세히 담을 수 없기는 다른 법도 마찬가지인데다, 1953년 제정 이후 7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관련 판례가 충분히 쌓여 법리·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배임죄는 '경영 실패'가 아닌 '신임 위배'를 처벌한다"며 "법원은 이미 다수의 판례를 통해 '경영상의 판단' 원칙을 존중하여, 경영자가 가능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설령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배임죄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연합뉴스오히려 참여연대는 "오히려 재벌총수들이 수천억 원의 손해를 발생시키는 배임행위를 저질러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아 오죽하면 3·5법칙(징역3년·집행유예5년)이란 말까지 생겼다"며 대개 기업 경영자·지배주주를 처벌하는 배임죄의 특성 탓에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졌던 관행이 더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찬반이 엇갈리는데도 정부가 속도전에 나선 점도 비판거리다. 경제개혁연대는 "그간 배임죄 폐지를 주제로 한 입법 논의가 사실상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법리로 인정되어 온 경영판단원칙 명문화나, 사문화된 상법상 특별배임죄 폐지, 가중처벌에 관한 목소리는 있었어도, 배임죄 폐지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 "이미 수사나 재판을 받고 있는 피의자, 피고인은 물론이고, 배임행위를 저지를 유인을 가진 이들에게 처벌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호를 전달할 가능성도 크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배임죄 폐지가 시장의 투명성을 약화시켜 자본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제적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상법상 이사충실의무 강화의 취지도 몰각시키고 자본시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한국 재벌과 대기업의 소유지배구조 현실을 고려할 때, 배임죄는 기업 경영자들의 권한 남용을 견제하는 핵심 장치이며 이를 폐지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신 정부는 배임죄 요건을 명확히 하고 처벌범위를 축소하는 대체입법을 함께 마련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특별법을 통해 기존 배임죄의 주체·행위 요건을 구체화하거나 △각 개별법에 구체화된 배임행위를 규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배임죄가 실제로 폐지되면, 처벌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미 배임 혐의로 재판 중이던 사건들에 대해 법원은 '면소'(소송 중지)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현재 수사·재판 중인 배임죄 관련 사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도 함께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형법 전문가인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승준 교수는 "형법에서 배임죄를 폐지하면 각 관련 개별법에 일일이 배임행위를 넣어야 한다"며 "가뜩이나 기존 형법이 쪼그라들고 특별법이 비대화돼 문제라는데, 개별 대체 입법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기존 사건이 면소돼 혼란을 빚을 수 있다고 지적하며 "부칙을 통해 정리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혼란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배임죄를 폐지하면 이처럼 공백이 너무 많이 생기는데, 곧바로 폐지한다면 국민들이 납득할까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