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랭킹 뉴스

'독립 만세' 함께 외친 두 소녀, 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닫기

- +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편집자 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10대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독립을 외쳤고, 때로는 성인 못지않은 무장 투쟁을 꾀했다. 그러나 나이를 고려치 않은 일제의 탄압에 스러져간 뒤, 희미한 기억조차 사라지고 있다. CBS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100년 전 어린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집중 조명한다. 작지만 강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가슴 벅찬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광복80주년 기념 CBS 특별기획 [기억을 잇다-100년前 어린 영웅⑤]
역사책 베끼고 일왕 사진 눈 뚫고…항일 의식 키워 대항한 학생들
전주 3.13 만세운동 주도한 기전여학생들…검거된 '13인 결사대'
"일본은 우릴 재판할 권리가 없다" 외친 임영신, 말년엔 '친일 변모'
'창씨개명·신사참배 거부' 끝까지 소신 지킨 김인애…조용히 잊힌 삶
친일·독재 부역 승승장구 임영신, 굴하지 않은 김인애…오늘의 과제는


▶ 글 싣는 순서
① 독서도 '죄'였지만…총 대신 책 들고 일어선 항일 10대들
② 시외버스에 항일벽보…'어린이'들의 기발했던 독립운동
③ 10대의 마지막 봄, '독립 만세' 외치다 팔과 눈을 잃었지만…
④ 손가락 신경 뽑히고 매질…'악질 왜놈 만행' 치를 떤 학생들
⑤ '독립 만세' 함께 외친 두 소녀, 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계속)
전북 전주 소재 기전여학교 학생 김인애·임영신·오순애·송귀내 등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 역사를 공부하자며 비밀결사 '공주회'를 결성한 때는 1915년 4월.
 
학교 당국에 조선의 역사를 가르쳐달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공주회는 김인애의 오빠 김인전 목사로부터 <동국역사>를 몰래 들여온 뒤 비밀리에 책을 베끼고 이를 돌려 읽으며 역사 의식을 높여갔다.
 
이러한 행위가 적발돼 '동국역사 필사' 작업이 중단되자 공주회 일원 오자현은 "자그만 힘이라도 모아 왜놈들을 골탕 먹이고 괴롭히자, 조금도 겁내지 말고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이건 하자"고 제안했고, 공주회는 또 다른 행동에 나선다.

1920년대 콜튼 교장 당시의 고등과 졸업반. 기전여고 제공1920년대 콜튼 교장 당시의 고등과 졸업반. 기전여고 제공

역사책 베껴 쓰고 일왕 사진에 구멍 낸 기전여학교 '공주회'

당시 기전여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 2명이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쳤고,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행사 때마다 일본 국가를 부르게 하고 일왕이 있는 쪽으로 절을 시키켰던 상황.

공주회가 중심이 된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기로 한다.

이 직후 열린 행사에서 일본인 선생의 구령에 따라 일본 국가가 시작됐지만 대다수는 이를 따라 부르지 않았고 이어진 동방 요배에서도 학생들은 선 채로 버텼다.

이러한 일이 몇차례 반복되어 경찰까지 학교를 찾았지만 주동자를 찾지 못했다. 결국 학교는 조회 시간이나 행사 때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임영신·김인애·강정순·김연실·오자현 등은 한발 더 나아가 일왕 사진을 훼손하기로 마음 먹고 밤 늦게 기숙사를 빠져나와 교실마다 걸린 사진 속 일왕의 두 눈을 뚫어버렸다.

학교 당국의 추궁 속에 오히려 학생들은 저마다 '내가 했노라' 나서면서 결국 모두가 처벌을 피한 채, 학교는 교실 내에서 일왕의 사진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이 또다시 성공한 것이다.

"우리 강토 빼앗고 우리 부모 학살한 너희가 어찌!"

전국적으로 번진 1919년 3.1만세운동을 맞은 공주회는 임영신이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김인전 목사 등에게 전달하는 등, 3월 13일 전주 장날에 맞춘 만세 운동을 계획한다.

'당지에서는 십삼일 오후 일시경에 각 학교 생도 급 일반시민 중 수백 명이 각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거쳐 재판소 앞까지 쇄도하여 시위운동을 행하였는데, 이날은 마침 면 장날인고로 뇌화하는 자 수천 명에 달하여 일시 혼잡을 극한 바, 경관이 민활한 활동으로 즉시 이를 해산하고 약 이십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 중에 기전여학교 생도 십삼 명이 체포되었으며 일반 시민은 철저 경계 중이라더라'. 1919년 3월 15일 매일신보.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당지에서는 십삼일 오후 일시경에 각 학교 생도 급 일반시민 중 수백 명이 각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거쳐 재판소 앞까지 쇄도하여 시위운동을 행하였는데, 이날은 마침 면 장날인고로 뇌화하는 자 수천 명에 달하여 일시 혼잡을 극한 바, 경관이 민활한 활동으로 즉시 이를 해산하고 약 이십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 중에 기전여학교 생도 십삼 명이 체포되었으며 일반 시민은 철저 경계 중이라더라'. 1919년 3월 15일 매일신보.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첩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과 경찰의 감시 속에서 채소 가마니에 태극기를 숨겨 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정오 종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 일로 기전여학교 학생 30여명이 붙잡혔고 그 중 임영신과 김인애를 비롯한 13명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감옥에 갇힌 공주회 회원들은 초지일관 당당한 태도로 일본의 심문에 맞섰다. 1919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소요 사건에 관한 민정보고서엔 이렇게 언급돼 있다.
 
"1919년 4월 18일 총독부 시학관 다나까는 전주 감옥을 찾아 수용 중인 임영신을 주모자로 하는 기전 여학교 만세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실에 호출했다. 다나까는 그들에게 "그릇된 불온사상을 가지고 소요를 일으킨 결과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니 후회되지 않느냐? 속히 가정에 돌아가도록 해 줄 터이니 모든 것을 털어놓아라"하고 회유했으나 그중 주모자 임영신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을 기도했으니 몸은 비록 어떻게 되든 독립운동을 결코 중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건 만세 사건에 관련된 주모자들은 '도저히 회유할 수 없는 용납지 못할 악질분자'들이다"
 
3개월의 옥살이 끝에 보석이 허가된 학생들은 6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법정에서 재판 받는다.
 
최후 진술 기회가 주어지자, 임영신은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또한 우리 조국의 앞날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그런데도 우리를 갖가지 고문과 옥살이로써 죄인 대접을 하는 것은 만고의 죄가 된다는 것을 당신네들은 알아야 한다. 내 나라 내 강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당신들 일본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재판장은 어린 여학생들이라는 점을 들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다.
 3.1만세운동직후수감됐던 기전학생들 출옥기념사진(앞줄 좌에서 두번째가 임영신). 기전여고 80년사3.1만세운동직후수감됐던 기전학생들 출옥기념사진(앞줄 좌에서 두번째가 임영신). 기전여고 80년사일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맞섰던 어린 기전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에 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일본인 검사가 엄하게 심문을 했는데 학생들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대답을 했는데 "우리들이 어찌 너희의 판결에 복종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들인데 반대로 삼천리의 주인인 우리에게 불법이라고 하니 옳지 못한 판결이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중>

한 목소리로 '독립 만세' 외쳤지만…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이렇듯 일제에 맞서 똘똘 뭉친 공주회였지만, 일부는 서서히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일본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외친 임영신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난 후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활동해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적극 옹호하고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선 것이다.
 1941년 10월 22일 경성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다. 1941년 10월 23일자 <매일신보>1941년 10월 22일 경성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다. 1941년 10월 23일자 <매일신보>조선임전보국단은 이름 그대로 전쟁에 임하기 위한 단체로, 그 강령은 물질 근무 공출의 철저화, 국민 생활의 최저 생활화, 전시 봉공의 의용화였다. 국민은 최저 수준의 생계유지만 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쟁 물자로 공출하자는 취지다. 단체의 활동에 따라 교회당의 쇠 종, 집의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전쟁 물자가 됐다.
 
임영신은 1942년 2월 1일,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강연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독려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 중에서도 친일파가 생길 정도로 1938년 이후엔 지식인 상당수가 친일로 돌아섰다"며, 친일로 변모한 임영신의 행동을 "일본에 의한 세계 지배를 내면적 신념으로 받아들인 자의 전형적 태도"라고 평가했다.
 
임영신은 광복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승승장구한다.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고 첫 여성 국회의원이 되는 등 윤택한 삶을 이어갔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후엔 <나는 왜 군사정권을 지지하는가>란 성명을 내며 5·16쿠데타를 옹호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아랫줄 왼쪽 두번째가 임영신, 여섯번째가 이승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공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아랫줄 왼쪽 두번째가 임영신, 여섯번째가 이승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공

'항일 소신' 굽히지 않은 대가…"어찌 살았는지 모를 어려운 삶"

반면 김인애는 학생 때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의 요시찰 대상이 된 김인애 그리고 그 오빠 김인전 목사 가족의 삶은, 무릎꿇지 않는 신념으로 인해 피폐함을 벗지 못했다.

결국 김인전 목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대에 객사한다. 김인애 지사의 가족은 김 목사의 동생 김가전 목사가 이끌었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삶이었다"는 게 김인애 지사의 손자 김상수(78)씨의 회고다.
 
입에 풀칠만 가능할 정도의 처지였음에도 김인애는 소신을 지켰으며, 진학과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김인애는 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어를 모르는 줄 알았다'는 김씨의 아들 김진화씨는 생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일본어를 못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일제가 여성들을 정신대로 끌고 갈 때, 첫째 딸 김옥정도 정신대에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유창한 일본어로 호통치는 모습을 보며 일부러 안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인애는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고아들을 모아 기르는 등 평생 이웃을 위해 살다 생을 마감한다. 김상수 씨는 "명절 때마다 우리 집 앞에 바가지를 들고 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며 "김치며 반찬, 곡물 등을 다 나눠주시고는 '올해는 다 끝났다'라고 하시던 할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안 한 조선인이 어디 있느냐"며 독립운동 사실을 밝히길 거부하고, 후손들에게도 굳이 말하지 말라 당부했던 김인애는 2009년이 되어서야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대통령 훈장도 받는다.

2009년 3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김인애 지사의 손자 김상수(78)씨에게 대통령 훈장을 전달하고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2009년 3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김인애 지사의 손자 김상수(78)씨에게 대통령 훈장을 전달하고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독립 영웅들 흘린 피와 눈물에 비례해 역사를 기억하고 담아내야

함께 독립을 외쳤지만 결국 일제의 손을 잡고 만 임영신과 평생 소신을 지킨 김인애의 엇갈린 삶은 아직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친일 역사 청산의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친일 문제에 대한 미완의 평가도 온전하게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임영신의 친일 행위는 명백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엔 등재되지 않았다"며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여러 타협을 거쳐 친일파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김재호 지부장은 이어 "국민의 역사 인식이 성장해 더 나은 사회적 합의를 마련한다면 임영신과 김인애 같은 인물이 재평가되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려운 일"이라고 아쉬워했다.

100년 전 어린 영웅들이 흘린 피와 눈물에 비례해 역사를 기억하고 담아내는 일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여전한 숙제로 남겨진 형국이다.

0

0

실시간 랭킹 뉴스

오늘의 기자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