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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이재명 아이디 '631000' 뜻?…40대 중반에 A+ 받은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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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메일 속 '631000'…생일 정확히 몰라
노동운동 대가 金·운동권 출신 아닌 李
李, 노무현 강연 듣고 인권 변호사 뜻 품어
李 가장 어려운 시기…23년 체포동의안 가결

김문수, 고3 때부터 3선 개헌 반대 운동 동참
서울대 복학 때 40대 중반…매일 출석해 A+
2014년, 金 고난의 시기…모든 선거서 패해
'나 도지산데'로 꼰대 이미지…원칙 때문에?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1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박순봉 (경향신문 기자)
 
앞서 예고 드린 대로 대선 주자들의 삶을 좀 분석해 보는 인물 탐구 인생 네 컷. 대선 기획으로 준비했습니다. 함께해 주실 분은 경향신문의 박순봉 기자 어서 오십시오.
 
◆ 박순봉> 안녕하세요.
 
◇ 김현정> 오늘은 뉴스연구소 대신 대선 기획 인생 네컷으로 돌아오셨는데 사실 모든 7명 후보의 인생을 다 알면 좋아요. 유권자들이. 다 알면 좋지만 방송 시간상, 여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여론조사상 2강이라고 불리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두 후보 인물을 탐구해 보신다고요.
 
◆ 박순봉> 네, 좀 굉장히 시간이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두 명만 보더라도 굉장히 우여곡절들이 많았습니다.
 
◇ 김현정> 먼저 그럼 이재명 후보의 삶부터 짚어볼까요?
 
◆ 박순봉> 어린 시절이 굉장히 불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좀 생각하기 힘든 일인데 정확한 생년월일을 이재명 후보는 몰라요.
 
◇ 김현정> 생년월일을 어떻게 몰라요?
 
◆ 박순봉> 그러니까 요즘같이 아이들이 적을 때는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이재명 후보는 5남 4녀 중에 7번째로 태어났거든요. 그랬는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1963년 10월 23일에 태어났다라고 했는데 이재명 후보는 이 날이 아마 실제로는 아닐 거다, 이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어머니가 추정하신 걸 거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바로바로 이렇게 출생 등록도 하지 않았고 또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좀 집안이 어려웠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넘어갔을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등록을 하고 초등학교를 보내고 이런 상황이 필요하니까 기억에 의지해서 기록을 했을 거라는 거고 그래서 좀 흥미로운 게 이재명 후보의 그런 계정명 있잖아요. 이메일이나 이런 걸 보면 ljm, 이건 이재명이죠. 그래서 631000 이렇게 해놨습니다.
 
◇ 김현정> 왜 0000이에요?
 
◆ 박순봉> 날짜를 정확히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10월달에 그냥 태어났다라는 의미로 보통 자기 생일을 이렇게 넣어놓잖아요. 이렇게 해놨고요. 그래서 호적상 생년월일을 보면 1964년 12월 22일생인데 이거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있거든요. 동명이인이 있는데 그 거사를 치르던 날을 그냥 이재명 후보의 아버지가 생일로 호적상 등록을 한 겁니다.
 
◇ 김현정> 임의로 정한 거군요.
 
◆ 박순봉>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태어나서, 당시에는 국민학교였죠. 경북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성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때 이동할 때도 굉장히 좀 어려웠다라는 얘기들이 많아요. 그런데 증언들이 좀 다양하게 있는데 거의 도망을 치듯 갔어야 했다, 이런 얘기들도 좀 있고요. 그래서 어렵게 이동을 했는데 여기 가서 학교를 못 다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집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소년공 시절이 되는 거죠. 그때 야구 글러브 만드는 공장에서 왼쪽 팔뚝을 프레스에 찍히게 돼요. 그래서 6급 지체장애 판정을 받고 이것 때문에 군 면제까지 받게 됩니다. 이재명 후보 자서전 보면 이때 정말 많이 맞았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거기 같이 일하는 형들, 이런 사람들한테 맞았고 또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걸로 속여가지고 취직해서 일을 했다라고 합니다. 그 이후에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가지고 중앙대에 입학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흥미로운 거는 그때 전두환 정권이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만으로 대학교를 갈 수 있게 해줘요. 그래서 이재명 후보 본인 표현으로도 전두환은 싫지만 전두환 덕분에 대학을 갈 수 있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사실 본고사를 하게 되면 이거는 막 과외도 받고 준비할 게 되게 많은데 학력고사는 그보다 조금 단순화된 시험이었으니까.
 
◆ 박순봉> 그렇습니다. 그래서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을 하면서 오로지 사법시험에 집중을 해서 1986년에 사시를 합격하게 됩니다. 이 지점이 좀 흥미로운 건데 당시 학생 운동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민주당의 주축이 됐는데 이재명 후보의 일생을 짚어보면 학생 운동을 할 수가 없었죠. 여건상. 그리고 대학 가서도 사시에만 집중을 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이게 이 민주당에서는 세대교체의 의미이기도 하고 또 잠시 뒤에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볼 텐데 김문수 후보는 학생운동 되게 열심히 했고 노동운동의 대가로 불리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민주당에서는 운동권 출신 아닌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되고 국민의힘에서는 반대로 운동권 출신이 대선 후보가 되는. 그렇게 되면 특이점, 오히려 반대로 되는 그런 좀 아이러니한 그런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원래도 인권 변호사 뜻이 있었는데 사법연수원 시절에 노무현 전 대통령 강연을 들었다 그래요. 그때 인권 변호사가 돼야 되겠다, 이렇게 확정을 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 차리고 그다음에 시민운동가 활동을 하다가 2010년에 성남시장이 되면서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 김현정> 인생 네 컷의 첫 번째 컷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이었다면 두 번째 컷. 정치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 고난의 시기랄까요? 좀 어려웠던 시기는 어떤 시기인가요?
 
◆ 박순봉> 사실 이재명 후보 어려웠던 위기는 너무너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성남시장 때부터 같이 했던 측근한테 어제 한번 물어봤거든요. 언제가 가장 어려웠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그 시점이 제일 어려웠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측근이 하는 말이 저도 그렇고 이재명 후보도 그렇고 그때 정말 힘든 때였다. 가장 위기였다라고 생각을 한다.
 
◇ 김현정> 굉장히 오래 정치를 했는데 한 장면 가장 어려운 걸 꼽아라 하면 그 2023년 체포동의안 가결 그때를 꼽는다고요?
 
◆ 박순봉> 맞습니다. 그때 두 차례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넘어오거든요. 그러니까 재작년이었죠. 재작년 2월에 한 번, 9월에 한 번 넘어오게 되는데 그때 첫 번째는 부결이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다시 가결이 돼요. 그때 당시에 이재명 후보 단식 투쟁도 하고 이랬었죠. 그런데 이 측근이 하는 얘기를 좀 전해 드리면 그때 분위기가 주변에 있는 동지들이 일단 검찰에 다 기소가 됐다라는 거예요. 그 주변에 압수수색이 막 되고 이렇게 해서 버티고 버텨서 한번 부결이 됐는데 그래서 좀 괜찮겠거니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다시 넘어오니까 뭔가 절망스러웠다라는 거예요. 한 번 되게 큰 높은 산을 넘어갔는데 이게 끝나지 않는구나, 이게 정말 사면초가다, 이젠 피할 수 없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특히 힘들었던 게 그때 당시에 두 번째 체포동의안이 가결되기 전에 의원들이나 당 사람들을 만나면 이 사람의 표현으로는 당신 때문에 민주당 망하는 거 아니냐. 체포동의안 가결시킬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 잘 설득해라, 이런 식의 모욕을 이재명 후보가 엄청 많이 당했다라는 거예요. 본인도 간접적으로 받고 그런 모욕을 당하는 것도 보고 이런 상황들이 꽤 있었다라는 겁니다.
 
◇ 김현정> 이건 측근들이 얘기하는, 측근들이 꼽은 가장 어려웠던 시기.
 
◆ 박순봉> 그래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지금 이재명 후보는 DJ보다 더 당권이 강력하다, 이런 평가를 받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당에서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구조 자체도 이재명 후보가 주류가 아니라는 그런 인식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랬는데 이 상황을 기각이 되면서 넘어가게 되죠.
 
◇ 김현정> 그렇군요. 그 인생 네 컷 얘기하다 보면 테러에 대한 얘기도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부분도 한 컷으로 꼽습니까?
 
◆ 박순봉> 네, 그 체포동의안이 가결이 되고 그다음에 구속영장은 기각이 되면서 기사회생을 하게 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당권을 잡았다라고 보기는 좀 어려워요. 물론 측근 그룹들은 그때 이후부터는 좀 괜찮았다라는 거예요. 재보궐도 이기고 이런 상황들이 쭉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다만 다른 민주당 관계자가 표현을 하기로는 그때 1월 2일에 테러가 있었던 거죠. 그리고 다행히 운 좋게 목숨을 잘 건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이었는데 그 이후부터 여론이 확실하게 바뀌면서 이재명 후보가 적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라는 겁니다.
 
소위 그 이후에 공천에 대해서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이재명 후보 쪽에서는 그냥 경선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거라고 하지만 또 비명계 쪽에서는 비명횡사라고 그렇게 표현들을 했었잖아요. 이런 상황들, 공천을 적극적으로 행사를 하고 특히 지금 말하는 어떤 보수로 넘어가는 그런 흐름들을 보이고 있잖아요. 확장하려는 그런 움직임. 이런 것들도 이때부터 성장 같은 거 얘기하면서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 관계자의 표현으로는 원래는 이재명, 이해찬의 연합 지도부였고 이재명 후보의 단일 지도부가 아니었는데 테러 이후부터는 단일 지도부로 전환이 되는 순간이 왔다라는 겁니다. 완벽하게 당권을 잡게 됐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공천에서도 적극적으로 힘을 내고 그다음에 이 당내에서 힘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까 소위 말하는 우클릭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라는 겁니다.
 
◇ 김현정> 그러면 지금 인생을 쭉 보고 있는 건데 이 테러를 당하던 그 순간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고 굉장히 아슬아슬했고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그때부터 힘이 더 모아지고 어떻게 보면 이해찬, 이재명이 아닌 이재명 단일 리더십으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전화위복 같은 거였다고 보는 거예요?
 
◆ 박순봉> 맞습니다. 이게 좋은 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사례들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여론의 지지가 확실하게 실리게 됐고 그다음에 그 이후부터는 당원들 사이에는 이재명을 지켜야 된다,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을 하거든요. 이게 최근까지 쭉 이어지고 있는 그런 계기도 됐던 거죠.
 
◇ 김현정> 알겠습니다. 인생 네 컷 네 번째 컷은 어딘가요?
 
◆ 박순봉> 2016년 연설이에요. 이거는 제가 또 역시 다른 측근한테 물어봤는데 그때를 뽑더라고요. 2016년 10월 29일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때도 탄핵 국면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하라면서 여러 가지 집회들이, 소위 말하는 촛불 집회가 쭉 이어졌던 그런 시기였는데 그때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이었거든요. 그때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연설이 굉장히 주목을 많이 받게 됩니다.
 
◇ 김현정> 박근혜 하야를 주장하는 광장에서의 촛불집회 자리에서의 연설.
 
◆ 박순봉> 그래서 측근 그룹이 평가를 하기로는 이걸 하면서 전국적인 지도자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대선 출마하잖아요. 그때 3등을 하게 되지만 2등이랑 격차가 크지 않았거든요. 그런 발돋움을 하는 그런 계기가 됐다라고 평가를 해요. 그래서 이때를 또 중요하게 꼽고 사실 또 하나 꼽는 거는 대법원에서 또 무죄 나는 그런 사례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까지 해서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다,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 김현정> 이게 지금 박순봉 기자 혼자 꼽은 게 아니라 그쪽 캠프에서도 이러이러 이런 장면들을 중요한 장면으로 봅니다 하는 거 다 지금 취합해서 취재하신 거죠?
 
◆ 박순봉> 좀 가까운, 성남시에 있었던 분들한테 물어봤습니다.
 
◇ 김현정> 측근들 통해서 취재하고 이래서 꼽으신 장면인데 2016년에 그 연설, 촛불집회에서의 연설이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이런 연설을 꼽았다는 게 참 인상적이네요. 인생 네 컷 대선주자 인물 탐구, 이번에는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로 가보겠습니다.
 
◆ 박순봉> 역시 노동운동 얘기부터 해야 되는데 사실 노동운동의 전설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내용들을 쭉 정리하면서 보니까 이재명 후보도 되게 어려웠고 김문수 후보도 되게 어려웠다고 그래요.
 
◇ 김현정> 가난했다.
 
◆ 박순봉> 어린 시절에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그랬는데 공부를 좀 잘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원래 영천 출생인데, 경북 영천 출생인데 경북중학교로 어린 시절에 유학을 보내주게 됩니다. 선생님이 잘하다 보니까 가봐라라고 해서 이후에 경북고, 서울대 경영학과까지 다니게 되고요. 주목되는 거는 고3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 김현정> 고등학교 때부터요?
 
◆ 박순봉> 그때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합니다. 이게 어제 행보랑 좀 같이 연결이 되더라고요. 3선 개헌 반대가 뭐냐 하면 박정희 정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 연장하려고 3선을 가능하도록, 대통령도 3선 가능하도록 헌법 개정한 건데 그때 고3 때 이거를 반대하는 그런 운동을 하다가 정학을 당하거든요. 무기정학 받아요. 그런데 어제 김문수 후보가 대구 가서 이런 얘기하거든요. 젊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 반대했지만 철이 들고 나니까 그거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다.
 
◇ 김현정> 어제 뭐라고 그랬냐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무덤에 침을 뱉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꽃을 바친다,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 박순봉> 맞습니다. 그리고 고3 때 이런 운동을 했고 대학 가서도 유신 반대를 외쳤어요. 그래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굉장히 적극적으로 했고요. 이력 중에 특이한 게 대학을 25년 만에 졸업을 합니다. 40대 중반에 졸업을 하는데 제적을 두 번 당하고 두 번 투옥되면서 이런 상황들이 벌어졌어요. 그리고 저도 그 뉴스연구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제적당하고 여러 가지 노동운동 하면서 체포된 적도 있었거든요. 특히 1986년에 검거가 되면서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해요. 그런데 같이 노동운동 했던 심상정 전 의원의 위치를 불라고 했지만 끝내 불지 않고 버텼다라는 거는 굉장히 노동계에서도 화제가 되는 얘기입니다.
 
◇ 김현정> 서노련이죠, 서노련. 심상정 동지의 이름을 고문당하면서도 불지 않았다.
 
◆ 박순봉> 그렇죠. 이거를 좀 상상하기 어렵다라는 거예요. 고문당하면서 얘기 안 한다라는 게. 그래서 굉장히 원칙주의자고 강하다. 이런 평가들을 많이 했던 그런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칙주의자 사건으로 좀 그냥 에피소드 같이 회자가 되는 거는 서울대를 굉장히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교수가 나중에 복학을 했을 때 워낙 40대 중반의 나이로 왔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수업 꼬박꼬박 안 오셔도 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매일 출석을 해서 A 학점을 받았다. 뭐 이런 것들은 원칙주의자 사례다.
 
◇ 김현정> 그래서 홍준표 전 시장이 탈레반이라고 그랬잖아요. 김문수 후보한테. 원리원칙주의자라고. 이 첫 번째 컷이 그 청년 시절 노동운동 시절이라면 두 번째 컷은 어디입니까?
 
◆ 박순봉> 결국 우파 진영으로, 지금 보수 진영으로 넘어온 시점.
 
◇ 김현정> 그러니까 이 부분을 다들 어떻게 해서 가장 끝에 있던, 가장 좌측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우측으로 오게 된 거야, 궁금해들 하세요.
 
◆ 박순봉> 그 시기가 2014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노동운동을 쭉 하다가 노동 세력을 모아가지고 민중당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아주 소위 표현하자면 극좌 정당을 만들었다, 이렇게도 표현을 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랬는데 김영삼 총재의 권유로 당시에 민주자유당 총재였거든요. 권유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이적을 하게 돼요. 파격 이적이었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좀 엇갈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왜 넘어 왜 갔느냐?
 
◇ 김현정> 왜 갔느냐.
 
◆ 박순봉> 모 측근한테 들었을 때는 이런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좀 굉장히 실망을 많이 하고 이게 좀 바뀌어야 되겠다, 이렇게 평가를 하는 측근도 있고요. 측근이 아니고 당에서 오랫동안 김문수 후보를 본 사람 중에서는 권력 의지가 굉장히 강하다, 이런 평가도 해요. 권력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민중당은 국회의원을 배출하지는 못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적인 안을 선택한 게 아니냐, 이렇게 좀 평가들은 엇갈리는데요. 어쨌든 넘어가면서부터는 굉장히 잘 됩니다. 2014년에 넘어가서 국회의원 3번 하고요. 그다음에 경기지사도 2번을 합니다. 이렇게 하게 된 게 1996년부터 2014년까지입니다. 아까 잘못 말씀드렸죠. 넘어간 건 1996년입니다.
 
◇ 김현정> 그러네요. 그러네요.
 
◆ 박순봉> 그런데 세 번째 컷을 뽑자면 이렇게 잘 나가다가, 파격 이적을 하고 잘 나가다가 어려워진 게 2014년이에요.
 
◇ 김현정> 2014년 고난의 시기로 한 컷을 뽑아 오신 건데 왜 이때입니까?
 
◆ 박순봉> 그때 경기지사 임기가 6월에 끝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모든 선거에서 다 지게 됩니다.
 
◇ 김현정> 모든 선거라면 어떤 선거요?
 
◆ 박순봉> 예를 들어서 2016년에 대구로 내려가 가지고 선거를 하게 되는데 김부겸 전 총리한테 패하게 되고요. 서울시장 선거 나가게 되는데 패하게 됐고요. 사실은 그에 앞서서 어제 국민의힘 모 관계자가 하는 얘기는 2014년 6월에 경기지사 임기가 끝나게 되는데 7월에 서울 동작을에 보궐선거가 있거든요. 이거 안 나간 것부터가 굉장히 패착이었다, 이렇게 평가를 하더라고요. 그때 어떤 상황이었냐면 정몽준 의원이 서울시장 나가면서 보궐이 생겨요. 여기서 당시에는 한나라당 때였죠. 한나라당에서는 고민을 했던 게 누구를 넣어야지 여기 이길까.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기동민 의원이라든가 노회찬 의원들이 나와 있었거든요. 쟁쟁한 인물들이 나와서 내부적으로 돌려보니까 김문수 후보만 근소하게 이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에 윤상현 사무총장, 김세현 전략부총장이 막 쫓아다니면서 나와 달라고 막 설득을 합니다. 소록도까지 가요. 김문수 후보가.
 
◇ 김현정> 찾으러?
 
◆ 박순봉> 두 사람 또 쫓아서 소록도로 가고 이렇게 설득을 했는데 끝내 안 합니다.
 
◇ 김현정> 왜 거절한 거예요?
 
◆ 박순봉> 이것도 역시 해석이 엇갈리는데 측근 그룹에서는 이건 어차피 명분이 없다라고 좀 봤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경기지사 했다가 갑자기 서울 이런 데로 나와가지고 하는 게 이해가 좀 안 간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당의 모 관계자 같은 경우에는 국무총리 하고 싶어서 안 했다.
 
◇ 김현정> 국무총리하고, 지사까지 했는데 경기지사. 다시 일개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갈 게 아니지라고 생각하면서 국무총리를 꿈꿨던 게 아니냐.
 
◆ 박순봉> 그리고 실제 국무총리설이 있었거든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시킬 수 있다라는 얘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기다렸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다 평가들이지만 친박계에서 반대를 하게 되는데 그 인물들이 또 재미있는 거는 김재원 전 최고위원, 이런 인물이에요. 김재원 비서실장, 이정현 전 의원.
 
◇ 김현정> 그래요? 그때 그분들이에요?
 
◆ 박순봉> 왜냐하면 그때 당시 친박계였잖아요.
 
◇ 김현정> 지금 김재원 비서실장.
 
◆ 박순봉> 네, 친박계여서 굉장히 대립 구도였고 공격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 또 같이 있잖아요. 그래서 모 측근 같은 경우에는 격세지감이라고 얘기를.
 
◇ 김현정> 정치가 원래 그래요.
 
◆ 박순봉> 그런데 이거를 얘기하면서 하는 얘기는 또 뭐냐면 굉장히 원칙주의자이긴 하지만 구원은 좀 잘 안 갖는 스타일이라는 거예요. 김문수 후보가.
 
◇ 김현정> 한마디로 뒤끝, 이런 뒤끝은 없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동작을에 나경원 의원이 그때부터 가게 됐던 건가요?
 
◆ 박순봉> 맞습니다. 그래서 나경원 의원은 그 이후에 이런 정치 커리어를 쌓게 되는 상황이 오는 거고요. 만약에 김문수 후보가 그때 갔다면 잘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얘기하는 측근 그룹들도 있습니다.
 
◇ 김현정> 거기서부터 하여튼 김문수 후보는 판판이 선거에 지면서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좀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 박순봉> 거의 무너졌다라고 보고 특히 2019년에 자유통일당을 만들면서부터는 극우라는 표현들을 많이 받게 되는데 거의 정치적으로 포기를 했는데 윤석열 정부에서 경사노위 위원장 그다음에 노동부 장관 하면서 다시 복귀를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 김현정> 다음 컷은 어디입니까?
 
◆ 박순봉> 원칙주의자 김문수, 이걸 좀 언급을 할 때 김문순데, 사건, 이걸 좀 얘기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 김현정> 김문순대. 이번 SNL에서도 '김문순데' 사건 가지고선 재미있게 클립으로 만들었던데.
 
◆ 박순봉> 사실 2011년 말에 있었던 일인데 아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텐데 경기지사 시절에 어디 남양주의 요양병원을 갔다가 소방에 전화를 해서, 119에 전화를 해서 관등성명을 좀 대라는 취지로 나는 김문수다, 도지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면서 이게 알려지게 됐고요. 이게 소위 말하는 꼰대 이미지가 생기는 사건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측근 그룹이 평가를 하는 거는 해명일 수도 있는데 관등성명을 대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을 했다라는 거예요.
 
◇ 김현정> 원래 그렇게 얘기하면, 나 도지사라고 먼저 내가 댔으니 상대도 대는 게 원칙이다.
 
◆ 박순봉> 그래서 정치인 김문수라면 당연히 그거는 좋지 않은 일인데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이런 얘기도 하고요.
 
◇ 김현정> 그런데 이번에 사과했어요. 사실은 그게 원칙이라고 하더라도 그럼 원칙이니까 답하시오,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그냥 나 도지사인데 당신 누구요? 계속 이렇게…
 
◆ 박순봉> 맞습니다.
 
◇ 김현정> 굉장한 비난을 받았었거든요.
 
◆ 박순봉> 그 이후로 사실 내리막길도 시작이 됐던 거고요.
 
◇ 김현정> 맞아요.
 
◆ 박순봉> 하나만 좀, 그 권력욕이 있다라는 얘기가 있는 제가 에피소드를 들어서 이것만 하나 좀 말씀드리면 2003년에 대외 인사 영입위원장을 당에서 맡거든요. 김문수 재선 의원 때였습니다. 인재영입위원장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때 내년에 총선이 있으니까 공심위 명단을 짜오라고 내부에 당에 실무자들한테 지시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당에서 들어보니까 실무자들이 쭉 명단을 짰는데 그때 홍준표 의원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원장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올려 가지고 넣어서 냈더니 이걸 받아본 김문수 후보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라는 거예요. 내가 왜 맨날 박근혜 밑에만 있어? 하면서 서류를 툭 쳤다라는 거예요. 이 얘기를 하면서 하는 얘기는 뭐냐면 권력욕이 굉장히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 굉장히 강하다.
 
◇ 김현정>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쭉 들어보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심상정 동지의 이름을 불지 않고 당을 완전히 바꾸면서도 그 불태웠던 권력욕. 그런데 이런 분한테 지금 단일화를, 그냥 내놓으라고 했으니.
 
◆ 박순봉>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말해준 사람은 당연히 단일화는 안 될 거라고 처음부터 예측을 했다라는 거예요. 권력 의지가 굉장히 강하고 그다음에 아까 이렇게 진보, 보수 막 넘나드는 거에 대해서 모 측근이 하는 얘기가 그거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어보니까 전향을 하는 사람의 특징일 수도 있겠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후보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대요. 지옥이 아니고 매일매일 연옥을 사는 듯한, 이런 느낌이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라는 거예요.
 
◇ 김현정> 그게 무슨…
 
◆ 박순봉> 왜냐하면 끊임없이 계속해서 확인하려고 했다라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더 강한 표현들이 나온 게 아니냐, 이런 해석들이 있습니다.
 
◇ 김현정> 오늘 대선주자 인물 탐구, 2강이라고 지금 할 수 있죠. 지지율상. 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두 거대 야당의 후보들 인물 탐구해 봤는데 사실은 네 컷으로 부족해요.
 
◆ 박순봉> 사실 더 많이 있는데.
 
◇ 김현정> 한 10컷쯤은 해야 되는데 여기까지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 들려드렸습니다. 취재해 온 박순봉 기자 고맙습니다.
 
◆ 박순봉> 감사합니다.
 
※ 내용 인용 시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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