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너지부 건물. 연합뉴스미국 에너지부가 지난 1월 우리나라를 '민감국가'에 등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추진해온 '핵 잠재력' 논의도 급선회하는 모양새다. 여권에서 거론하던 '자체 핵무장' 주장이 미국의 민감국가 조치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핵 잠재력(고농도 우라늄 농축이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등 핵무기 원료 확보)'은 물론 민주당내 주류 목소리인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 확대' 주장 역시 사실상 미국이 자체 핵무장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논의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평가다.
'핵 잠재력' 거론됐지만…李 "현실성 없는 핵무장론" 저격
17일 민주당은 일제히 정부여당 인사들의 '핵무장' 주장 전력을 비판하며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ensitive and other designated Countries List·SCL) 등재에 대한 해결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재명 대표는 "'1년 안에 핵무장을 할 수 있다'거나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허장성세, 현실성 없는 핵무장론과 함께 함부로 동맹국에 대한 통보나 언질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락조차 응하지 않은 상황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고 여권을 향해 날을 세웠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본래 여야를 막론하고 원자력 이용 권한 확대는 우리나라의 오랜 숙원이었다. 특히 민주당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강조하면서 미국을 상대로 우라늄 농축 권한 확대 등을 얻어내자는 기류가 강했다.
실제로 농축도 20% 가량의 저농축우라늄(LEU)은 소형 모듈식 원자로(SMR)의 연료로도 쓰인다. 우리나라가 러시아에서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농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북한 핵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인식 하에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보유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최근에 나오고 있었다.
우라늄 연료봉을 원자로에서 가동시킨 뒤 이를 질산에 녹여 플루토늄을 뽑아내면(PUREX) 핵무기의 원료가 된다. 물론 미국은 여기에 대해 우리가 관련 기술조차 보유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낸 민주당 박선원 의원은 지난달 17일 당 국방안보특위 비전선포식에서 "핵무장이라고 하는 주제를 우리 스스로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며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관이 상시적으로 나와 있는데, 이 사찰을 받으면서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여권 주요 인사들이 외치는 '핵 잠재력 확보' 주장과 매우 유사한 발언이어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핵물질을 확보한 뒤 난이도가 비교적 낮은 기폭장치와 미사일 등 운반체까지 제작하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핵 잠재력' 꺼냈던 박선원도 "재고 필요"…사실상 추진력 상실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 윤창원 기자그러나 이달 들어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 에너지부가 우리나라를 민감국가 목록에 등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민주당내 '핵 잠재력 확보' 논의는 급속도로 힘을 잃게 됐다.
대표적 주자였던 박선원 의원은 이날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본인이 주장했던)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추진하기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관련 상황에 대해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재고해야 한다"며 입장을 급선회했다.
그는 "미국 에너지부가 나섰다는 것은 (핵 문제에 대해) 초보적인 논의조차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라며 "바이든 행정부 때 이미 결정이 난 사실을 몰랐는데, 한미동맹과 상충된다면 (핵 잠재력 논의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달 전 민주당내 핵 잠재력 논의를 꺼냈던 당사자인 박 의원조차도 물러섰다는 점을 감안할 때, 관련 주장은 이제 당내에서 사실상 추진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도부에서도 당내 '핵 잠재력' 언급을 진화하고 나섰다. 한민수 대변인은 관련 질문에 "제가 아는 한 핵 잠재력 확보에 대해 당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논의한 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윤종군 원내대변인도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얘기하던 내용은 국민의힘 측 주장과 전혀 다른 차원이고, 수위에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핵 잠재력'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 확대' 논의도 당분간 활발히 진행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우라늄 농축',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 등 우리나라의 원자력 능력 확대 관련 논의 모두를 미국 입장에서는 '자체 핵무장' 움직임의 연장선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냈던 민주당 위성락 의원은 "유일한 옵션은 '핵무장을 하지 않고 핵 잠재력 확보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농축·재처리 권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협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