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번역원 제공 최근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강, 김영하, 편혜영 등의 소설 작품이 번역되며 세계 독자들과 만나온 가운데, 이제는 한국의 시론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바로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無限花序)'가 그것이다.
이 책은 2023년 미국에서 'Indeterminate Inflorescence: Notes from a Poetry Class'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단숨에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번역 도서 부문(바리오스상) 1차 후보작에 선정되며 영미권 등 해외 문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2024년에는 영국 펭귄북스의 임프린트 앨런 레인(Allen Lane)에서 정식 출간되며, 세계 문학계에서 한국 문학의 창작론이 새롭게 조명받는 계기가 됐다.
뉴욕 타임스는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를 평론하며 "기존의 서구적 시 창작 이론과는 다른, 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창작 철학"이라고 호평했다.
가디언은 "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사고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기존 창작 이론과 차별화된다고 평했다.
끝없이 피어나는 시의 가능성 '무한화서'
한국 시인이 창작론을 통해 세계 문학의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이성복 시인은 누구이며, '무한화서'는 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가?
이성복 시인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68년 경기고교에 입학했으며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해 등단한 후,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의 시는 전통적 서정성을 넘어 독창적인 감각과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다. 이후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등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성복은 단순히 시인으로 머물지 않았다. 그는 1987년부터 2017년까지 계명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시 창작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 바로 '무한화서'이다.
이 책은 시 창작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감각을 깨닫고 확장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제목인 '무한화서(Indeterminate Inflorescence)'는 식물학 용어로 "줄기에서 꽃이 끝없이 피어나는 구조"를 뜻하며, 이는 시 창작이 하나의 완결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주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성복은 책에서 시 창작이 기술적 연마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시적 감각을 발견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내 속에 이미 있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 뿐이다."
이는 기존의 시 창작론과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다. 서구적 시론이 구조적 분석과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면, 이성복의 시론은 직관적 감각과 시적 경험을 통한 탐구를 강조한다.
시는 가르칠 수 있는가?
'무한화서'가 영어권에 소개되면서, 해외 문학계에서는 한국 시론이 지닌 독창성을 새롭게 발견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번역 출간된 'Indeterminate Inflorescence'는 단순한 창작 이론서가 아니라, 현대 문학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제공하는 텍스트로 읽혔다. 이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국 문화 콘텐츠가 가진 힘의 근원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해외 언론들의 반응을 보자.
뉴욕 타임스는 "이성복의 시론은 기존의 창작 강의와 다르다. 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은, 시적 경험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한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은 "이 책은 단순한 작법서가 아니다. 이는 언어와 경험, 그리고 창작 행위의 관계를 탐구하는 문학적 철학서에 가깝다"며, 기존의 분석적 접근법과 차별화된 점을 강조했다.
인디펜던트는 "이성복의 시론은 동양적 사유와 현대적 감각이 결합된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며, "시 창작을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확장한다"고 극찬했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해외에서 'Indeterminate Inflorescence'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 문학이 번역된 것이 아니라 '한국적 창작론'이 서구 문학의 새로운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구조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이 아닌, 감각과 직관을 중심으로 시를 이해하는 접근법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무한화서'는 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감각을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성복은 시를 단순한 언어적 구조가 아니라, 경험과 존재의 확장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는 시를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시적 감각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시는 가르칠 수 있는가?"
이성복 시인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화서'는 바로 그 발견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제 한국 문학은 번역을 넘어, 세계 문학의 창작론을 새롭게 쓰고 있다. 그 시작이 바로 끝없이 피어나는 시의 가능성을 탐구한 '무한화서'이다
한편, 한국 독자들에게도 낯선 이 책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 신청에서 두 차례 떨어졌지만 번역가인 안톤 허가 주도해 미국 시애틀의 작은 출판사 'Sublunary Press'를 통해 첫 출간됐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방탄소년단(BTS)의 알엠(RM·본명 김남준)이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에 대한 글을 올려 찬사를 보내면서 전 세계 독자에게 크게 알려지는 계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