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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신작 '할매' 출간…"600년 팽나무가 기록한 문명·생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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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전의 땅, 소멸까지 포착한 문명과 생태
"문명 전환의 시기, 문학의 역할도 크게 달라져"
"절필 위기 넘어…죽을 때까지 글 더 쓰고 싶어"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창비 제공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창비 제공 
"인간의 시대를 넘어 '생명의 시간'을 중심에 놓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세계적 작가 황석영이 5년 만의 장편소설 '할매'(창비)를 펴내며 "600년 동안 존재해온 한 그루 팽나무의 시간으로 돌아가 인간과 문명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황석영은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을 지나며 인간이 만든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지 목격했다"며 "언어와 문명이 흔들리는 시기, 문학이 바라봐야 할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고 밝혔다.

신작 '할매'는 금강 하구 군산 하제마을의 600년 된 팽나무를 중심축으로 삼아, 조선 초기부터 근현대까지의 역사를 생명·생태의 관점에서 다시 엮어낸 작품이다. 이야기는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개똥지빠귀 한 마리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새의 뱃속에 있던 씨앗이 서해 갯벌에 내려앉고, 그 씨앗이 600년을 버틴 팽나무 '할매'로 자라난다.

황석영 소설 '할매'의 모티브가 된 군산 하제마을 600년 수령의 '팽나무'. 참여자치군사시민연대 제공  황석영 소설 '할매'의 모티브가 된 군산 하제마을 600년 수령의 '팽나무'. 참여자치군사시민연대 제공 
작품 전반부에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황 작가는 "내 소설에서 인간이 이렇게 늦게 등장하는 건 처음"이라며 "생태계와 비인간 존재의 시간을 중심축으로 세운 것 자체가 이 시대가 요구한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할매를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 기록하지 못한 시간을 새긴 존재'로 설정하며, '생명이 역사의 주체'라는 문제의식을 작품 전체에 관통시킨다.

소설은 팽나무가 늘려가는 나이테를 따라 수백 년간 인간과 자연이 겪어온 비극·번영·소멸을 펼쳐낸다. 불가에서 수행하던 승려, 천주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 우금치 전투에서 산화한 동학농민군, 일제강점기 군산 비행장과 미군부대 확장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삶까지, 한국사를 관통하는 인간 군상이 후반부 서사를 이끈다.

황 작가는 특히 새만금 간척과 갯벌 소멸, 철새 폐사 장면을 언급하며 "새만금 방조제로 철새 20만 마리가 사라진 비극은 생태 문제이자 이 땅의 기억이 단절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이 거창해 보이지만 자연이 겪는 환란과 비교하면 오히려 호들갑처럼 느껴진다"며, 소설 속 할매가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아 역사를 품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 생태적·기억적 시간의 연속성에 있다고 덧붙였다.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집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집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그가 최근 군산으로 내려가 집필하게 된 배경 역시 생태·역사 현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군산은 산업도시와 식민지 근대의 흔적이 공존하는 공간이라 성장 환경과 닮아 정서적으로 안정됐다"고 말했다. 이어 "평생 반전·평화운동에 헌신해온 문정현·문재현 신부 형제가 새만금과 팽나무를 지키려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평택 대추리·제주 강정·새만금 등에서 땅을 지켜온 사람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작품에 녹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혼란에 대한 질문에도 그는 특유의 관점을 드러냈다. 12·3 내란 1년을 맞아 상황 인식을 묻자 그는 "80이 넘으면 사회가 나를 내버려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불러낸다"고 말하며 "팬데믹·AI 확산·기후 위기·내란까지 겹친 시대에 문학은 공동체의 윤리와 감정을 다시 묻게 한다"고 답했다.

그는 "AI 시대일수록 양극화는 심해지고 일자리는 줄어든다. 시민사회가 선한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민주주의 과제"라고 덧붙였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에 대해 그는 "역사를 인간만의 시간으로 기록하면 파편화되지만, 생명 중심의 시점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체로 보게 한다"고 말했다. 인간이 중심에서 물러나야만 종(種)의 경계와 문명 간 변동을 읽을 수 있다는 취지다.

최근 금관문화훈장 수훈 소감도 솔직히 밝혔다. "예술가는 국가 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어 과거 두 차례 거부했다"며 "여러 문인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이번엔 받아들였지만, 국가와는 늘 긴장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늘 꼽히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황 작가는 차기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과 관련한 질문에 "노벨상이 가진 서구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서 여전히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 중심의 강대국의 패권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문화 예술을 꿈꾸는 세계 작가들과 연대하면서 새 흐름을 만들어보려 한다"며 "더 늦기 전에 1980년대 명맥이 끊긴 자유와 저항, 인권 신장에 기여한 문학에 수상하는 '로터스(Lotus)상' 부활을 계획하고 있다"는 의지도 밝혔다.


창비 제공창비 제공
한편, 80대에 접어든 지금도 집필 의지는 굳건하다. 그는 "해외에서 다리를 다쳐 반년 동안 글을 못 쓰며 갑자기 늙었다. 한쪽 눈도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감고 쓴다"며 "그래도 두세 작품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일기라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황석영 문학은 오래도록 '대하 서사'의 정점으로 불려왔다. '객지', '장길산', '손님', '심청, 연꽃의 길', '여울물 소리' 등 대표작은 물론, 전작 '철도원 삼대'에서 한국사의 격동을 인간 집단의 경험 속에서 풀어낸 그는 이번에는 한 그루 나무의 뿌리로 내려가 역사를 다시 긷는다.

'할매'는 인간 종(種)의 역사를 넘어 '생명 전체의 역사'를 다루는 작품으로, 황석영 문학의 새로운 확장을 보여준다. 팽나무 한 그루에 600년의 시간을 실어 '삶·죽음·문명·순환'이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다시 지상의 생명들에게.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황석영 지음 | 창비 |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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