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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로 수많은 피해자 울리는 '그 범죄'[법정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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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스마트이미지 제공
법원 게시판 한쪽에는 '오늘의 재판 일정'을 정리한 재판 목록 서류가 붙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느 피고인이 오늘 어떤 혐의로 재판을 받는지 일정이 시간 순서로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찬찬히 그 종이들을 살펴봅니다. '문화재보호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와 같이 평소 흔히 볼 수 없어 눈에 띄는 죄명들이 있는 반면에 매일 수도 없이 많아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죄명도 있습니다. 바로 '사기 범죄' 말이죠.
 
너무도 흔하지만, 직접 사기 혐의 재판을 방청해 보면 그 속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오늘 법정B컷은 사기 범죄 재판을 들여다봅니다. 피해자들의 울분 맺힌 목소리도, 왜 사기 범죄가 끊이지 않는 지도요.
 

'수법'도 가지각색

사기 범죄에서 나타나는 태양(형태)은 그야말로 '천태만상(千態萬象)'입니다. 재벌 3세를 사칭해 범행을 벌이는 이도, 급전이 필요한 이들의 간절함을 공략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도 있습니다.
 
지난 9일,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사기 범행을 저지른 50대 여성 A씨에 대한 선고가 진행됐습니다.
 
2024.07.09.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사기 사건 선고 中
판사 : 피고인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과거에 사기죄 처벌을 받을 당시 이용했던 범행수법, 즉 '연예인 스타일리스트'를 사칭하며 귀금속을 교부받는 방식으로 총 50회에 걸쳐 23명의 피해자들에게 귀금속을 편취했습니다. 합계 5억원 이상의 재물을 편취했습니다.
 
채무에 시달리던 A씨는 지난해 5월 16일 한 귀금속판매업체에 찾아가 "연예인 B씨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드라마 촬영에 사용될 귀금속을 대여하는 방식으로 협찬해주면, 가게가 홍보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생각해 낸 A씨의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야 할까요? 의심 없이 홍보를 위해 귀금속을 건넨 업체들은 A씨의 획기적인(?) 수법에 모두 당하고 말았습니다.
 
A씨는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피해자 중 3명에 대한 배상명령도 함께요.
2024.07.09.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사기 사건 선고 中
판사 : 피고인의 죄질이 상당히 나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서, 이 형량은 어느 정도 선처한 겁니다. 알겠죠? 향후 피해자들이 피해 물품 찾는 데에 있어서 피고인이 구금됐더라도 가족에게 부탁해서라도 힘쓰셔야 합니다.
이날 재판장은 A씨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피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늦었지만 힘쓰라고요.
 

'규모'도 기상천외

서울중앙지법 전경. 연합뉴스서울중앙지법 전경. 연합뉴스
사기 범죄는 그 '규모'도 천차만별입니다. 적은 돈을 앗아간 사기 범행도 있지만, 그 규모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범행도 있습니다.
 
지난 9일 오전, 법원 안팎은 여느 때보다 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4400억원대 유사수신 사기 범행을 저지른 아도 인터내셔널 대표에 대한 선고가 있는 날이었거든요.
 
앞서 아도인터내셔널 대표 이모씨를 비롯한 이들 일당은 지난해 2월부터 7월까지 아도인터내셔널 계열사 등에 투자하면 원금이 보장되고, 복리이자·추천수당·직급수당 등 명목으로 투자금의 1.0%~13.8%의 수익금을 받을 수 있다고 속여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거액을 끌어모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아도인터내셔널이 모집한 투자자는 3만 6천여명, 투자금은 약 4467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접수된 피해자는 2106명, 피해 금액은 490억원에 이르지만,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수도 있고요.
 
그날,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 같은 돈을 가져간 사람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지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법정을 찾았습니다. 전부 법정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피해자들은 법정 안에서, 법정 밖 복도와 건물 밖에서 선고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2024.07.09. 서울중앙지법 형사25단독 '아도 사기' 사건 선고 中
판사 : 유사수신은 선량한 시민을 자극해 투자금을 끌어들여 경제질서를 왜곡하고 단기간에 피해자를 양산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아도인터내셔널 대표) 피고인 이모씨를 징역 15년에 처합니다.


이날 법정이 꽉 차 법정 밖 복도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피해자 이모(72)씨는 '징역 15년'이 선고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법정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타깝게도 기쁨의 환호성은 아니었습니다. 허리 디스크를 앓는 와중에도 간병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이씨는 '아주 잘 나가는 것처럼' 수익을 자랑하며 통장을 보여주던 지인의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고 아도인터내셔널에 2천만원을 투자해 피해를 봤습니다.
 
이씨는 선고 결과를 듣고 너무도 원통했습니다. 이토록 막대한 범행의 결과가 겨우 '징역 15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던 거죠. 선고 이틀 후 저녁에도 이씨는 법원 앞에 나와 '사기꾼들을 강력히 처벌 해달라'는 피켓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처벌은 '솜방망이'

이씨의 생각대로, 사기죄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은 징역 10년 이하인데, 2건 이상의 사기죄를 범한 피고인의 경우 '경합법 가중'에 따라 법정최고형에서 최대 2분의 1(5년)까지 형을 더할 수 있어 최대 징역 15년 선고가 가능합니다. 미국처럼 모든 죄에 대한 형을 각각 선고해 이를 모두 합산하는 대신(병과주의), 가장 중한 죄에 가중하는 방식(가중주의)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난달 피해자 300여명으로부터 800억원의 전세금을 가로챈 '세 모녀 전세사기 사건'의 모친 김모씨 또한 고작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선고하면서, "현행법상 사기 경합 최고형이 징역 15년이기에 그와 같이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더 중한 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현행법상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내비친 거죠.
 
이런 '솜방망이' 처벌로 인해, 앞서 소개한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사건 당사자인 A씨도 첫 범행 이후 실형을 살고도 끊임없이 범행을 반복한 겁니다. A씨는 이번 범행 전에도 2009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가방이나 귀금속 등을 '협찬' 명목으로 편취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복역 이후인 2015년에도 귀금속 매장을 운영하는 피해자들에게 위탁판매 혹은 화보 촬영 등을 명목으로 수십 회에 걸쳐 7억원 이상의 귀금속 등을 편취한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재차 복역했죠.

연합뉴스연합뉴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中
제3조(특정재산범죄의 가중처벌) ① 「형법」 제347조(사기), 제347조의2(컴퓨터등 사용사기), 제350조(공갈), 제350조의2(특수공갈), 제351조(제347조, 제347조의2, 제350조 및 제350조의2의 상습범만 해당한다), 제355조(횡령ㆍ배임) 또는 제356조(업무상의 횡령과 배임)의 죄를 범한 사람은 그 범죄행위로 인하여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한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의 가액(이하 이 조에서 "이득액"이라 한다)이 5억원 이상일 때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 한다. 
1.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이득액이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일 때: 3년 이상의 유기징역


한편 피해액이 5억원 이상일 때는 일반 사기죄가 아닌 '특경법상 사기죄'가 적용돼 3년 이상의 유기 징역이, 피해액이 50억원 이상일 때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가중처벌이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전체 범죄의 피해액을 따지는 대신, 피해자별 피해액을 따지면 5억원 미만인 경우가 많아 가중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특히 여러 범죄 행위를 하나의 죄로 보는 '포괄일죄'가 아니면 피해자별 피해액을 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가중처벌이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기꾼들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적용을 피하려고 머리를 쓰기도 합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새변) 방민우 변호사는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편취 액수 자체를 5억원이 되게는 절대 안 한다"며 "실질적으로는 3천만~4천만원대 피해가 제일 많다"고 설명합니다.
 
아도 사기 피해자 이씨도 이러한 현실과 '솜방망이 처벌'을 비난하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아도 사기' 2천만원 피해자 이모(72)씨 인터뷰
이씨 : "(선고 결과를 듣고) 그때는 돈을 떠나서 막 좀 분하고 그런 마음이…우리가 고생하고, 악랄하게 이리 사기 친 걸 생각하면은…다들 말하는 게, 이 나라 사법부의 법이 죄인들한테, 이 사기꾼들한테 너무 관대하다고 하나같이 입 달린 사람은 다 그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기가 끊이지 않는 거예요.
 
사기당한 걸 생각하면 어…가슴이 터지고 막 눈물이 줄줄 나고, 진짜 저는 남편도 지병으로 일찍 하늘나라 가고, 나 혼자서 애 셋 키워 가지고…애들은 다 결혼해서 나가고 그러니까 노후가 걱정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조금씩 조금씩 모은 거 노후 대책 마련한다고 (투자)한 게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이 법이 우리가 (피해액이) 5억원 이상 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형을) 더 받을 수가 있대요. 그런데 노인들, 서민들, 못사는 사람들이 그저 몇천만원, 몇천만원 이렇게 노후 대책 하려고 모아놓은 거를 가져갔으니까…어떤 사람은 암 치료하려고 모아놨던 거 다 투자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액수를 투자한 사람이 없어서…(징역 15년이) 
이게 최고형이래요. 15년이. 그러니까 분하죠. 분하죠. 진짜 분하죠.

 
과연 이씨의 억울함이 풀어지는 날이 올까요?
 
다행히도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제131차 전체회의를 열어 사기 범죄 양형기준 수정안을 심의했습니다. 다음 달, 해당 안을 확정해 내년 3월 양형기준을 최종 의결할 예정입니다.
 
더 이상 '천의 얼굴'을 가진 사기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억울한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사기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가능해지는 날이 오길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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