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종전 계획 구상 대신 강경 발언을 쏟아내면서, 중동 전쟁 장기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른 한국의 에너지 수급 전망에도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정부는 종전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 장기화 사태에 대비하겠다는 방침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수급을 대체할 원유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원유 자원안보 위기 경보를 '경계'로 격상해 수요 관리도 강화한다.
트럼프 "이란 석기시대로 만든다"…중동 사태 장기화 전망
3일 산업통상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중동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수급 불안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범부처 대응에 나서고 있다.
전쟁 장기화 전망은 1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 이후 한층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모든 군사적 목표를 아주 조만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2~3주 동안 이란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에서 종전 계획을 밝힐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오히려 군사 작전 확대 방침을 밝히면서 전쟁 장기화 우려를 키웠다.
문제는 이 같은 강경 기조로 에너지 공급 차질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지난달 초 호르무즈 해협을 마지막으로 통과한 유조선이 지난달 20일 국내에 들어온 이후, 열흘 넘게 호르무즈발 원유 도입이 중단됐다.
우리나라로 향하는 중동산 원유의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만큼, 해협 봉쇄 이후 국내 기름값 상승과 나프타 차단 등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주요 산업과 생활 전반으로 피해가 확산할 가능성이 높다.
연합뉴스정부, 대체 원유 확보 총력…비축유 스와프로 숨통
이에 따라 정부는 에너지 수급 불안 장기화에 대비해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산업부 양기욱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전날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더라도 우리가 맞이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며 "종전 선언을 한다고 해도 호르무즈 통행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물량이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등 불확실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쟁 종전 여부와 관계없이 에너지 수급 불안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취지다.
정부는 전쟁이 종료되더라도 공급망 회복에만 최소 한 달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 실장은 "국제유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비틀어진 공급망이 회복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위기대응 체계는 종전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며 "재고 물량 문제로 공장이 멈췄다가 정상화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부는 우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하지 않는 대체 원유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선 이번 달 대체 원유 물량으로 5천만 배럴을 확보했다. 평시 도입량 8천만 배럴보다는 적지만, 중동 사태를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라는 게 산업부 설명이다.
부족한 물량은 비축유 스와프(SWAP) 제도로 충당한다. 비축유 스와프는 정부가 보유한 비축유를 기업이 도입하려는 원유와 맞교환하는 제도다. 이를 통해 민간의 대체 원유 확보를 최대한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차량 5부제 시행 첫 날인 25일 국회 정문에 관련 요일별 운휴차량 끝번호가 안내돼 있다. 황진환 기자위기경보 '경계' 격상…차량 2부제 등 수요 억제
대체 원유를 최대한 확보하는 동시에 부족분은 국내 수요 축소로 대응할 방침이다. 정부는 전날부터 원유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기존 '주의'에서 '경계'로, 천연가스는 '관심'에서 '주의'로 각각 격상했다. 자원안보 위기경보는 '관심-주의-경계-심각'의 4단계로 운영되는데, 중동 사태를 고려해 3단계로 올린 것이다.
오는 8일부터 공공 부문에서는 차량 2부제를, 공영주차장에서는 승용차 5부제를 실시한다. 대중교통 이용 촉진과 교통비 부담 경감 정책도 함께 추진된다.
다만 이른 시일 내 '심각' 단계로 격상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 실장은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호르무즈 해협 상황만 놓고 보면 현재도 원유가 원활히 수급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지금보다 더 악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며 "정유사들이 대체 물량을 확보하고 있고 정부 차원에서도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을 보며 대응하겠다"고 설명했다.
에너지 수급 불안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주요 석유화학제품 공급망 점검도 병행하고 있다. 원유 도입 차단이 석유화학 제품 수급 차질로 이어질 경우 주요 산업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날 수급 점검 회의를 열고 수액제 포장재와 에틸렌가스, 종량제봉투 등 석유화학 제품과 헬륨, 브롬화수소, 황산 등 소재의 수급 상황을 점검했다. 정부는 지난주 나프타 매점매석 금지와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한 데 이어, 플라스틱과 포장재 원료에 대한 추가 대응책도 마련 중이다.
전문가들도 중동 사태 장기화를 전제로 산업 불확실성 확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무역협회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호르무즈 해협 상황을 사실상 방임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며 "공급망 측면에서 고비용 구조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고유가와 원자재 조달 불안, 제조업 비용 상승 등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