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여성문학 선집' 발간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선옥, 이희원, 김양선, 이명호, 김은하, 이경수 교수. 민음사 제공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처음으로 정리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출간됐다.
민음사와 편·저자인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자간담회를 갖고 근현대 한국 문학사에서 국가·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에 밀려 주변화에 머물렀던 여성문학의 시대적 변천사와 '여성 글쓰기'의 장고한 흐름을 장장 12년 동안 7권의 선집으로 묶어냈다고 밝혔다.
모두 7권으로 이뤄진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망라했다.
근대 여성문학의 기점을 1898년 9월 1일(고종35년, 광무2년)에 발표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과 1898년 10월 18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부인회 애국가'로 정립한 데 대해 김양선 교수는 "여성이 '공론장'에 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여학교설시통문'과 '부인회 애국가'는 매우 계몽적인 담론 속에서 여성이 과거 '골방문학'에서 벗어나 언문, 한글을 통해 공론장에서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근대 여성문학의 첫 장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이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성교양지 '여자계'(女子界)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는 기존 문학사보다 20년을 앞당긴 셈이다. '여학교설시통문'을 쓴 저자 김소사, 이소사가 후일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한 뒤 정확히 20년 후 여성문학의 원류로 꼽히는 나혜석과 김일엽, 김명순 등의 등장이 한국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전7권으로 구성된 '한국 여성문학 선집'. 민음사 제공 연구모임은 문학사 담론에서 영미문학 연구사례와 선집을 예로 들며 시, 소설, 산문, 희곡 등 제도화된 문학 장르에서 일찌감치 탈피해왔다고 강조했다.
이명호 교수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평론집 '자기만의 방'(1929)에서 자신이 역사를 다시 쓴다면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18세기에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다룰 것"이라고 말한 점을 지적하며 "영미문학에서는 제도적 글쓰기뿐 아니라 자기 표현이 담긴 문학의 개념으로서 '글쓰기'(writing)이라는 보편적 표현을 사용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은 영미권과 달리 자기서사 문학의 비중이 적은데, 우리 문학에서 부족한 자기 이야기를 역사적 관계속에서 진정성 있게 담아내고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한국계 미국인 여류 작가가 쓴 '파친코'(이민진), '주인 노예 남편 아내'(우일연)는 큰 인기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연구모임은 이번 선집이 "기존에 부재했던 문학사 안에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사의 계보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여성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됐다.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시대 개관', 개별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의미를 짚는 '작가 소개'와 더불어 작품마다 시대와 맥락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 수록해 연구적 의미를 더했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1990년대 대표적인 소설과 시는 물론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소설과 시, 희곡도 다수 포함됐다.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출간 책임연구원을 맡은 김양선 교수가 집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이번 선집에서 여성문학사 대표 작품 선정에 있어 기존 문학사와 배치되는 지점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문학사에서 '여성문학은 불온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며, 그 의식화에 오히려 저항적으로 넘어서고자 했다고 강조한다.
이명호 교수는 "선집은 불가피하게 가치판단에 대한 선택과 배제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선택과 배제가 또 다른 권력의 작용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를 거스르면서 일정한 선택을 통해 여성문학사 계보를 만들 때 많은 것들이 충돌한다"며 "기존 남성 중심의 보편적 문학사에서 벗어난 젠더적 시각이 포함되는 적극적인 대항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품 선정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저자들은 "각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가해진 억압에 순응하기도 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와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에서 만날 수 있다"며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 이후 여성 독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책을 찾는 현상이 많아졌고 여성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한국 여성문학사의 길이 더 두터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