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부가 당초 이번주로 예정됐던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위한 수요조사 결과 발표를 또다시 미루면서 발표 자체가 아예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역·필수의료의 소생을 위해서는 단계적 의사 증원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당국이
의사단체의 강한 반발에 다시금 무릎을 꿇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애당초 의대 정원 확대에 소극적인 데다, 각 대학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의대 수요가 실(實) 정원을 결정할 적절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19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보건복지부는 일요일인 지난 12일, 의대 입학정원 수요조사 관련 브리핑을 13일 오전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기자단에 공지했다. 브리퍼로는 실무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복지부 전병왕 보건의료정책실장이 내정돼 있었다.
이같은 예고는 약 4시간 만에 갑자기 뒤집혔다. 진행일시·장소 등이 모두 정확하게 명시된 안내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경우다.
복지부는 당일 저녁 "내일(13일) 예정으로 안내드렸던 의과대학 입학정원 수요조사 결과 관련 브리핑은 연기되었음을 알려 드린다"고 밝혔다.
40개 대학의 의대증원 수요를 확인·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게 표면적 사유였다.
실제로 정부는 조사결과 발표가 '연기'된 것임을 강조했다. 내부 사정상 순연된 것일 뿐 다른 고려요인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밝힌 것이다. 혼선을 빚은 데 대한 유감을 전하는 동시에
"신속히 정리해 이번 주 내로 발표하겠다"며 늦어도 17일에는 브리핑이 진행될 거라 시한을 못박기도 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의 보건복지부·질병관리청·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조규홍 복지장관도 지난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출석해 '의대 수요조사 결과 발표 연기는 의협 눈치 보기 아닌가'라는 강은미 정의당 의원의 지적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조 장관은 "40개 대학의 의대정원 수요를 (2025년부터) 2030년(대입)까지 받았는데, 따져볼 것도 있고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연기했다"며 "발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하지만 정부는
별도의 공지 없이 결국 17일을 넘겼다. 내주 또는 이달 중에 조사결과를 내놓겠다는 '기약'도 없는 상태다. 복지부 관계자는 연이어 발표가 밀리는 이유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아직은 "향후 발표 일정도 확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의대 수요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용산 대통령실에 의료계의 항의가 빗발친 상황이 작용했다는 추정이 나오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연내 잠정적이나마 의대 확대 규모를 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부의 의사 증원 추진이 유야무야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이해관계가 걸린 직역단체의 반발에 '정책 타임라인'을 연기했다는 비판을 정부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앞서 복지부는 교육부와 함께 2025학년도 대학 입시부터 반영할 증원규모를 정하고자 전국 40개 대학을 대상으로 지난 9일까지 2주간 수요조사를 실시했다.
정부가 취합한 대학들의 의대 확대 수요는 당국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대학은 조사 마감 이튿날인 10일에도 회신을 보내 왔는데,
각 대학들의 희망 증원수치는 도합 2천 명대 후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의대 정원이 2006년 이래 18년째 3058명인 점을 고려하면,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인 셈이다.
물론
정부도 대학들의 최대 수요가 곧 확대 규모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본부들로부터 제출받은 증원계획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의학교육점검반'(반장 전병왕 실장)을 꾸린 이유기도 하다.
점검반에는 복지부·교육부 관계자와 함께 △의학교육평가원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한국의학교육학회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다만, 조사 결과가 먼저 공개돼야 서면 검토 및 현장 점검 등 본격적인 검증작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지난 10일 대한사립대학병원협회와 가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협회는 국립대병원뿐 아니라 사립대병원들도 인력 확충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견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제공정부가 주춤하는 사이
의협은 의(醫)-정(政) 협의 주체인 협상단을 교체하는 등 공세 수위를 강화하고 있다. 복지부가 의대 정원 문제를 논의할 상대는 환자·소비자 등 시민사회계가 아니라 '당사자이자 전문가인 의료계'임도 연일 내세우고 있다.
의대 수요조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광래 인천시의사회장으로부터 새롭게 협상단장을 넘겨받은 양동호 광주시의사회 대의원회 의장은 지난 15일 제17차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면 과학적 근거에 따라 적정 인력을 따져야 하는데, 지금의 수요조사는 전혀 과학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하다"고 주장했다.
또 수요조사 결과가 대학과 부속병원, 지자체 등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며 "이번 조사는
고양이에게 얼마나 많은 생선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정부가 '단편적이고 편향된 수요조사'를 근거로 의대 정원 확대를 강행할 경우 "(의협은) 2020년 이상의 강경 투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며
총파업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미 15일 항의 집회를 연 경기도의사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오후 반차를 내고 대통령실 앞 집회를 이어갈 방침이다.
의협은 이와 별개로 그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의대 확대를 주장해온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에 대한 징계도 추진 중이다.
대한의사협회가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의협회관에서 열린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 후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틀 후인 19일, 정부는 의대 정원을 단계적으로 늘리겠다는 '방향성'만 밝혔다. 이은지 기자
반면 정부가 "기탄없이 듣고 반영하겠다"고 약속한 '국민과 환자의 시각'은 거의 정반대다. 연합뉴스·연합뉴스TV가 지난 4~5일 여론조사업체 매트릭스에 의뢰해 만 18세 이상 남녀 1천 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는 의대 정원 확대 추진에 찬성한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