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감독 유재선) 수진 역 배우 정유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지극히 평범했던 한 인물이 점차 광기를 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배우 정유미의 연기는 왜 수진 역에 '정유미'여야만 했는지를 입증한다. 정유미는 스크린 안에서 완벽하게 수진이 됐고, 수진이 된 그의 눈빛에 도는 광기는 관객들 머리와 마음을 공포로 뒤덮는다. 바로 정유미라는 배우가 지닌 힘이다.
정유미가 연기한 수진은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린다. 남편 현수(이선균), 반려견 후추(뽀식)와 함께 살며 직장에 다니는 수진은 풍족하진 않아도 행복했다. 자다가 갑자기 눈 뜬 현수가 "누가 들어왔어"란 불길한 말을 뱉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이후, 잠드는 순간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현수는 이상한 행동으로 집안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치료도 해보지만 기행은 점점 심해지고, 수진은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평범한 일상이 공포로 변해가는 순간의 포착, 공포가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의 표현을 섬세하게 완성한 정유미의 연기를 두고 유재선 감독은 "연기력이나 감정이 소모되는 연기를 할 때마다 압도된 나머지 컷을 외치는 순간이 딜레이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 또한 "정유미, 이선균 두 배우가 처음부터 하드캐리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집중된 연기는 드물다"고 극찬했다.
이러한 극찬에 관해 정유미는 그저 믿음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했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선택한 이상 '믿음' 안에서 논다
완성된 '잠'을 본 정유미는 9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간결하면서도 무언가 담겨 있는 영화가 한 편 나왔다며 "내가 나오지 않았어도 재밌게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완성된 영화는 시나리오를 본 후 들었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후루룩 가버리는 게 좋았어요. '잠' 이전에 감정 표현이 되게 센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시나리오를 받고 이번에는 이렇게 가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짧고 군더더기 없이, 또 표현도 별로 없는 이야기 안에서 내가 어떻게 표현할지도 궁금했어요. 감독님이 어떻게 연출하실지도 궁금했고요."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지금 와서 아쉬운 것도 있다. 사람들로부터 '광기' 어린 연기에 대한 호평을 듣다 보니 조금 더 보여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유미는 "그런(광기) 생각을 하고 연기하진 않았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더 그렇게 표현했어야 하나 생각도 든다"고 했다. 평소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인 만큼 스크린에서나마 자신의 광기 어린 얼굴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평범했던 일상의 얼굴이 점차 광기와 공포에 찬 얼굴로 바뀌는 과정을 부담 없이 그려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믿음'이 있었다. 정유미는 "일단 내가 선택한 이상 나를 선택해 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거기서 노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촬영 시작 전에 전체적으로 그려나가는 게 있는데, 그걸 바탕에 두고 현장에서 감독님의 디렉션에 충실한 편"이라며 "감독님이 문제 내주시는 걸 잘 맞춰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고 이야기했다. 오랜 시간 퇴고를 거쳐 창작자의 마음이 담겨 완성된 시나리오인 만큼 이를 중시하고 싶다고 했다.
영화 '잠'(감독 유재선) 수진 역 배우 정유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벌써 네 번째 호흡…이선균이 안겨준 '믿음'
현장에서 정유미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데는 상대역인 현수를 연기한 이선균의 역할도 컸다. 이선균과는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에 이어 벌써 네 번째 인연이다. 수진을 제대로 연기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때도, 상대가 이선균이라 현장에서 마음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믿고 가는 부분이 있는 거 같다"고 말했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걸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다. 정유미는 "시나리오에서 좀 더 평면적으로 그려진 부분이 있는데, (이선균이) 그걸 현장에서 메워나가는 걸 보면서 대단하기도 했다"며 "난 간결하다고 표현했지만, 오빠가 비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메워가는 걸 보면서 괜히 오래 하는 게 아니구나, 괜히 매일 인생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이선균이 매 작품 인생 캐릭터를 만드는 게 대단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어느덧 배우로서 18년째를 맞이한 정유미 역시 매 작품 새롭고도 놀라운 모습으로 관객과 시청자 앞에 서 왔다. 정유미가 지금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고 늘 새로운 모습을 꺼내 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저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 나한테 주어진 이 시간을 잘 보내고, 또 좋은 게 있다면 내가 가진 에너지를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모든 배우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연기하는 동안에는 연기 잘하는 배우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그러면서 "궁금한 걸 잘 느끼고 잘 받아들이고 싶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정유미는 '잠' 홍보도 잊지 않았다. '잠'의 최대 매력을 알려 달라고 하자 어쩐지 낯설지 않은, 예능에서 많이 봤던 정유미의 모습과 말투로 이렇게 전했다. 정유미가 전한 포인트는 '봉준호 키드'라 불리며 걸출한 신인의 탄생을 알린 '유재선 감독'이었다.
"우리 영화는 유재선 감독의 영화예요. 제이슨 유의 영화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