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재의요구에 반발해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규탄 집회에 모인 간호사들. 이은지 기자윤석열 대통령이 행사한 간호법 재의요구권(거부권)의 파장이
이른바 '유령 간호사'로 불리는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의 업무범위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공의(레지던트)가 하는 업무를 대신 해온 이들은 현재 대한간호협회가 진행 중인 '준법 투쟁'의 주인공이다. 대리처방·대리수술 등
현행법상 간호사의 업무가 아닌 불법의료 관련 지시가 관행적으로 이뤄져온 점을 꼬집어 '법을 지키는(遵法)' 것이 도리어 비정상 상태가 된다는 역설을 내세운 것이다.
간협은 절대적인 '의사 수 부족'이 PA 간호사라는 음성적 존재를 양산한 근본적 원인이라고 본다. 간호법의 제정 의의도 '간호사가 간호만 할 수 있도록' 업무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간호법과 PA 간호사 문제는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며, PA 간호사의 업무영역은 내달 협의체를 구성해 본격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준법투쟁' 큰 혼란 없지만…처방·수술보조 등 PA 업무 광범위
2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간협이 "불법진료에 대한 의사의 업무지시를 거부"한 지 엿새째인 전날까지 준법투쟁으로 인한 일선 의료현장의 혼란은 크지 않았다.
서울 소재 한 상급종합병원의 관계자는 "아직까지 (내부)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라며 "(업무도) 평소 하던 바와 다르지 않고 간호 현장에서도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모 대학병원 관계자도 "(PA 간호사들의) 업무지시 거부 등은 딱히 없는 것으로 안다"며
"일부 간호사가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조직에서 개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고 밝혔다.
자발적 참여를 권고하고 있지만 협회 차원의 강제성은 없는 데다 이들의 모호한 법적 지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PA 간호사의 특수성이 반영된 준법투쟁은 간호법 재의요구에 반발한 간협이 꺼낸 상징적 카드다. 대한의사협회 등 간호법이 그대로 공포될 시 '전면 총파업'도 불사하겠다고 했던 보건복지의료연대와 달리 국민 생명을 볼모로 한 파업만은 삼가겠다는 의지도 작용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따르면, PA 간호사는 전국적으로 약 1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간호부서가 아닌 의국에 소속돼 약물처방, 수술 지원, 검사·시술 보조 등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만큼 이들이 '조직적 보이콧'에 나설 경우 의료공백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컸다.
간협은 지난 18일부터 '불법진료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회원들의 신고도 함께 독려하고 있다. 협회가 의료기관들에 배포한 '간호사가 수행 시 불법인 업무 리스트'에는
△채혈 △동맥혈 채취 △봉합 △초음파 및 심전도 검사 △의약품 처방 및 처치·검사 처방 △진료기록 작성 △수술보조(1·2번째 어시스트) △대리수술 등 무려 24가지가 담겼다.
대한간호협회가 PA 간호사들의 '준법투쟁'을 위해 일선에 배포한 '간호사가 수행 시 불법인 업무 리스트'. 간협 제공'의사 부족' 공백 메꾼 음성적 존재…"병상 증가곡선과 일치"
PA 간호사는
필수의료 과에 대한 기피 현상과 의사 수 부족이 맞물리며 10년 넘게 급증해 왔다. 지난 2018년 병원간호사회가 지원한 연구('500병상 미만 종합병원에서의 전문지원인력 운영실태-간호인력을 중심으로')를 보면, PA 간호사는 전담간호사(59.0%)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17.3%). 500병상 이상 의료기관에서는 그 비중(22.3%)이 더 높았다.
조사대상 PA 간호사들은 대체로 평균 연령이 32.1세로 전문간호사(평균 43.5세) 등에 비해 훨씬 낮았고, 총 임상경력이 5년 미만인 경우가 절반에 가까웠다(47.5%). 다른 간호인력이 전원 간호사 자격이 있었던 데 반해 설문에 응한 PA 중 6.4%는 간호사가 아닌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PA는 최근 부족한 의사의 인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원된 인력으로 생각된다"고 분석했다. 또
"적절한 보상, 역할·지위에 대한 제도적 보장, 명확한 업무기술 정립이 매우 시급한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에서는 PA 간호사가 별도 교육과정과 국가시험을 거쳐야 이를 수 있는 고유한 직역이지만, 한국은 이들의 존재를 뒷받침할 근거 법령이나 제도 자체가 없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정체성 혼란을 호소하며, 의료사고 발생 시 불거질 책임소재 문제로 불안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수서경찰서가 지난해 말 계약직 PA 간호사 채용공고를 냈던 삼성서울병원 고발 건과 관련해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윤석준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PA는) 미국에선 주별로 면허시험을 치르고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성 인력'"이라며
"우리나라는 확실치는 않지만 2000년대 중후반 정도부터 증가했는데, 병상 수가 늘어나는 곡선과 거의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상 수가 늘면 그에 맞춰 입원환자와 처치·수술도 당연히 늘지 않겠나"라며 병상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데 반해 환자 1인당 임상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최하위권인 국내 현실을 짚었다.
윤 교수는 "쉽게 얘기하면, 병원에서 주로 수술 쪽 서포트(지원)를 하는 간호사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건데, 최근 자료들을 보면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로 영역을 넘나들고 있는 상황"이라고 봤다.
"이참에 합법화"엔 의견 갈려…정부, 내달 '사회적 논의' 시작
일각에서는
이참에 우리도 해외처럼 PA 간호사를 제대로 제도화하자는 '합법화' 주장도 나온다.
간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 등은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의대 정원 증원과 전문의 추가고용 등 의사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 해결책이라 보는 시각이다.
다만, 의사만 늘린다고 혼재된 업무범위가 정리될 순 없다는 반론도 있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수는
"PA 간호사가 감당하고 있는 업무 70~80%는 전문의를 고용해도 (선뜻) 하지 않을 일"이라며 과거 전공의 영역에 있던 업무 상당수가 이미 PA에게 넘어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물론 수술장에서 개복 시 옆에서 잡아주고 도와주며, 꿰매주는 일은 의사가 해야 할 일"이라며 "(하지만) 병원이 전문의를 더 고용한다고 (의사들이) 엘튜브(L-tube)를 꽂고, 기관 절개한 데 튜브를 갈아끼우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간호법 사태로 부각된 PA 간호사 문제가 이렇게 곪은 데엔
낡은 의료법 체계를 수십 년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주요 의료행위에서 의사가 어디까지를 하고, 간호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가르마'를 타줘야 하는데 우리 의료법이 너무 낙후돼 있다. '의사의 지도 아래'라는 정도의 아주 모호한 조항 말고 구체적인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도 "의료법에 의사·간호사·치과의사·한의사의 업무 범위를 다 한 줄로 규정해놓고,
어떤 행위들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복지부가 유권해석을 내리는 방식으로 업무 범위를 정해왔다. 그러니 항상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부의 '땜질' 식 대응을 비판했다.
대한간호협회가 '불법진료 신고센터'를 통해 접수 중인 불법 진료행위 익명 신고 설문지. 간협은 24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신고현황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정부는 지난 22일 입장문을 통해
'간호법안은 PA 문제 해결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이번에 재의 요구한 간호법상 간호사 업무 범위는 현행 의료법과 동일하며
간호법이 시행된다 해도 PA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며 간협의 준법투쟁을 두고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또 간협이 정의한 불법업무 리스트는 일괄적으로 '불법'으로 단정될 수 없다며
"간호사가 수행가능한 업무 범위는 개별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간호사도 간단한 문진과 일반적 채혈 등의 진단보조행위와 주사행위, 구체적 지휘 하 조제·투약 보조는 가능하다고도 반박했다.
복지부는 "행위의 객관적인 특성상의 위험, 부작용 혹은 후유증, 당시 환자의 상태, 간호사의 자질과 숙련도 등 여러 사정을 참작해 개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시 취지"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다음 달부터 전문가, 현장 종사자, 관련 단체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꾸려 PA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병원의 인력구조, 보건의료인 간 업무범위 등을 전반적으로 다루겠다는 계획이다.
간협은 주무부처인 복지부가 '뒷북 대응'에 급급한 채 책임 전가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협회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불법진료 신고 현황을 포함한 '준법투쟁 1차 진행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