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황진환 기자"내 인생이 오늘로, 여기서 끝이야. 자식보다 예쁜 우리 고양이 나비를 못 구했어. 죽어가며 야옹거리는 걸 들었는데 미친놈처럼 뒤져도 못 구했어. 죽어가는 그 목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되는데. 집 탄 거는 다시 지으면 돼 돈만 있으면. 그런데 내가 스무 살부터 54년 동안 모은 LP판 3000장, 오디오기계 12대, 그것들도 어디서 구할 수가 없는 거야. 이걸 다 잃고 내가 다시 재활을 하는 게 힘들 것 같아." 1명 사망, 16명 부상, 산림 379ha 소실, 펜션 34채 등 시설물 101곳 전소 및 부분소실. 이번 '강릉 산불'이 낳은 피해 현황을 집계한 것이다.
피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재민들의 고통은 이 단편적인 숫자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주불이 100% 진화된 이후에도,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잃은 이들이 입은 상처는 밤새 뜨겁게 곪고 있었다.
"74년 인생 오늘로 끝" "꿈인지 생시인지" 만감 교차하는 이재민들
11일 발생한 '강릉 산불'로 이재민 500여 명이 강릉 아이스 아레나로 대피했다. 민소운기자
11일 오후 8시 50분쯤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찾은 강릉 아이스아레나에는 이재민 650명(323가구)이 머물고 있었다. 대피소에 마련된 136개의 텐트에서 이재민들은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있었다. 강릉시청을 비롯해 지자체 관계자 500여 명과 자원봉사자 300여 명도 이들을 돕고 있었다.
동네 주민 셋이서 텐트에 자리를 잡고 소주를 마시던 김형택(74)씨는 "내 인생이 오늘로 끝난 것 같다"고 수차례 얘기했다.
저동 솔밭 인근 주택가에 살던 김씨의 주택은 김씨가 아내와 함께 4년간 공들여 지어오던 새집이었다. 화재 당일 데크 페인트칠만 하면 그날로 완공이었다. 화재 직전까지만 해도 아내와 산에서 두릅을 따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아침을 먹었다.
난곡동에서 시작된 불이 어느새 김씨의 집을 덮쳤고, 김씨는 한순간에 집을, 반려묘를, 어른이 되고 쌓아온 54년의 추억을 잃었다. 집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허망감이 김씨를 괴롭게 했다.
김씨는 "인생이 끝났다"면서도 "현실감이 없고 지금 내가 소풍 나와 있는 것 같고 내일이나 모레 집에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아직은 갑작스레 닥친 재난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번 산불로 사망한 89세 전모씨가 자신의 재당숙이라는 전찬길(60)씨도 가족을 잃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씨는 "(숨진 재당숙이) 동네에서 주민들에게 나가라고 얘기를 해서 집밖으로 나왔다가 뭐를 다시 가지러 들어갔던 것 같은데, 결국 연기를 마시고 못 나온 것 같다"며 "전화가 안돼서 갔더니 이미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전화를 걸고 찾아갔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망한 전모씨가 살던 안현동 주택 인근에 본가가 있었다는 전씨는 "(본가 주택은) 8대째 살고 있는 120년 이상 된 가옥"이라며 "그게 타버린 건데, 나한텐 모든 추억이 있는 곳인데 동네 일대가 전소되어 버려서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다"며 탄식했다.
전씨는 "아직까지는 꿈 같을 뿐"이라며 "하루 이틀 지나서 다시 (타버린 주택 주변에) 가보면 조금 실감이 날까 싶은데, 아직까지는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펜션 34채 피해…"일터이자 삶의 터전 잃어"
지난 11일 강원 강릉시 난곡동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이 대피소가 설치된 강릉 아이스 아레나 대피소에 텐트가 설치돼 있다. 강릉=황진환 기자이번 산불로 피해를 입은 시설물 중 101곳 중 34채는 펜션이다.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불이 번진 만큼, 일터이자 삶의 터전인 펜션을 잃은 이재민들이 상당수였다.
강릉에서 태어나 안현동 해안가에서 20년 가까이 펜션을 운영해온 최상봉(72)씨의 2층짜리 펜션도 전부 불에 탔다. 믿기지 않아 다시 펜션을 찾아 간 최씨는 펜션이 완전히 주저앉은 모습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손님들 전부 깨워서 빨리 몸만 나와서 가시라고 한 뒤 차를 타고 빠져나왔다"며 "차 타고 가는데 위에서 막 불똥이 내려 덮치고 연기 때문에 앞이 안보이는데 겨우 나왔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생계가 막막하다는 최씨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라 경황이 없어 아직 머물 곳을 못 구했다"며 "이제 먹고 사는 게, 생계가 문제"라고 말했다.
경포해수욕장에서 6년째 펜션을 운영하던 최정희(53)씨도 "불이 났을 때 아무 생각도 안 났고 일단 손님부터 깨워서 옆집 할머니와 손님들 태워서 빠져나갔다"며 "아직 아무 생각도 안나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해보고 그래야 할 것 같다"며 "남편이 암 환자인데, 가족이 아픈 상황이니 더 착잡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안현동 해안가에서 펜션을 운영하던 A씨는 "다행히 우리 펜션은 계단만 타고 유리창만 파손됐다"면서도 "다른 집에 비해 좀 덜 탔지만 오히려 인근 펜션 사장님들한테 미안하고, 너무 힘들어서 아까 막 울었다"고 말했다. A씨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펜션을 예약했던 손님의 전화를 받으며 환불 절차를 안내하고 있었다. A씨는 "한 번 다녀가신 손님들 여럿이 문자나 전화를 많이 주고 위로를 해줬다"면서 '위로 말씀드립니다'라고 적힌 손님의 문자를 보여줬다.
재난 받아들일 시간 필요한 시점…"특별재난지역 선포 원해"
지난 11일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소방청은 최고 대응 수위인 소방 대응 3단계, 전국 소방동원령 2호를 발령한 가운데 이날 오후 강릉시 저동 펜션 밀집 지역에 불길이 번지고 있는 모습. 강릉=황진환 기자
이재민들이 재난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민들을 지원하러 봉사를 온 KT 김진홍 차장은 "지난 고성 산불 당시에도 40여일간 이재민들과 함께 했다"며 "처음에는 대부분 황망해하시고 경황이 없는데, 3일에서 5일쯤 지나면 그때부터 조금 자각을 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이재민들이 가장 바라는 건) 컨테이너 같은 거라도 지어서 집 근처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농사도 짓고 해야 하니 빨리 가고 싶어 하시는 데, 정부에서도 지원을 잘 하겠지만 빨리 복구되어 주민들도 안락한 삶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재민 이남선씨는 "불탄 펜션을 보고 오니 머리가 하얘져서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며칠은 지나야 될 것 같다"면서도 "아무래도 정부가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해서 조금이라도 우리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했다.
강릉시청 박은영 복지정책과 팀장은 "식사와 침구류, 응급구호세트, 의류 등 계속해서 지원을 확대해나갈 예정"이라며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이 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많은 도움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11일 오전 8시 30분쯤 강릉시 난곡동에서 산불이 시작됐다. 소방청은 '대응 3단계'와 '전국 소방 동원령 2호'를 발령해 진화 작업에 나섰고, 8시간 만인 오후 4시 30분 주불이 잡혔다.
불은 강풍에 나무가 넘여지면서 전신주 전선이 끊어져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원도와 산림청, 소방당국은 12일 오전 8시 30분 산불 최초 발화 지점을 중심으로 정밀 감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11일 "산림청과 소방청을 중심으로 기(旣) 구축된 관계기관 간 협력체계를 기반으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신속히 투입하라"고 긴급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