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일본 아사히신문은 지난 달 20일 칼럼에서 최근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윤석열식 햇볕정책'에 빗댔다. 한국이 과거 북한에 취했던 유화조치를 일본에 적용해 적극적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은 '선공후득'(先供後得.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을 하나의 기조로 삼았다. 그 점에서 윤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선제적 양보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이나 일본 같은 까다로운 상대와의 외교에선 이른바 '대승적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일본도 1980년대 전두환 정부에 40억달러 경협 선물을 안기며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한미일 삼각구도의 큰 그림을 그린 사례가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야권 일각에선 한때 정부의 대일외교에 대한 비판 일변도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존재했다. 정부가 설마 아무런 대가 없이 양보만 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4월 지방선거 이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6월쯤 예상되는 한국 방문 때 적절한 호응 조치를 내놓는다면 상황이 일시에 반전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한일회담 직후 "일본이 얼마간 성의를 보이거나, 미국이 (한미일 공조 차원에서) 약간의 선물만 줘도 윤 대통령의 외교 성과로 부각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뒤통수 맞은 '윤석열식 햇볕정책'…약자의 '선공후득'(先供後得) 한계
한일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는 양국 정상. 연합뉴스하지만 선공후득은 기본적으로 강자의 방식이다. 약자는 강자의 약속 위반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이번 한일회담에선 약속 자체가 이뤄진 적도 없다. 그저 일본의 선의에 맡겨졌을 뿐.
트럼프 시절 북미관계가 좌초한 것도 따지고 보면 약자의 선공후득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선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같은 '주동적 조치'에도 미국은 상응조치 없이 오히려 적대시 정책을 강화했다고 인식한다.
이런 사례에 비춰볼 때 일본이 선의로 화답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 같은 결말은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미국이 개입할 수는 있다.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30일 윤 대통령의 대일 양보에 대해 "국제무대에서 자주 보지 못하는 용기"라고 평가한 뒤 "우리는 적절하게(accordingly) 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화답을 압박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미국 못지않게 우익세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일본 정부로선 기본적으로 운신의 폭이 제한된다.
설령 뒤늦게 성의 표시를 한다고 해도 진정성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듯 늦은 사과와 배상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단지 국가적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불행했던 과거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는 일본이 과거사를 부정하고, 그 과거사에 대한 사과마저 또 다시 부정하며 반복적으로 신의를 깨기 때문이다.
日, 성의표시는커녕 독도‧위안부 등 尹 압박…외교안보팀 자중지란까지 겹쳐
독도 영유권 주장 강화한 일본 초등교과서. 연합뉴스
선공후득이란 전략적 관점에선 한일회담 이후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에게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일본은 약간의 호응 조치만으로도 과거사를 청산하고 한국에 당당히 협력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럼에도 일본은 어쩐 일인지 독도와 위안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및 수산물 문제까지 봇물 터뜨리듯 제기하며 윤 대통령을 궁지로 몰고 있다. 일견 소탐대실처럼 보이지만 일본의 또 다른 전략적 그림이 깔려있을 수 있다.
남기정 서울대 교수는 "(한일정상회담은) 미일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의 요청도 있고 하니 한 것이고, 한국이 (회담에) 들어와 주면 좋지만 일본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카드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정도면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고 봤을 것 같고, 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합의로부터) 떨어져 나가진 않을 것이라는 게 거의 확인됐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결국 윤 대통령으로선 일본의 '보은'은 고사하고 더 이상 뒤통수나 맞지 않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대통령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한일회담 후폭풍을 수습하기에 바쁘다.
여기에다 설상가상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의 석연찮은 사퇴로 자중지란에 빠졌다. 역대급으로 높아진 북한의 위협 속에 12년만의 미국 국빈방문을 앞둔 윤 대통령에게 중대한 시련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