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윤창원 기자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도발적 발제'가 긴 파장을 낳고 있다. 그의 주장은 통일 논의는 봉인하고 미래세대의 결정에 맡기되 지금은 남북이 두 국가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 정착에 힘쓰자는 것쯤으로 이해된다.
이에 보수‧여권 뿐 아니라 야권에서도 통일을 포기했다거나 북한을 추종한다는 등의 여러 비판과 우려가 제기됐다. 북한이 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이미 예고한 대로 '두 국가' 개헌에 나설 경우 이와 맞물려 논란이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통일 논의는 다소 시끄럽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통일이 꼭 신성불가침의 영역일 수도 없고 자유롭게 토론돼야 한다. 문제는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소모적 논쟁이다. 이는 단지 비생산적인 폐해를 넘어 논의 자체를 왜곡하는 심각한 해악이다.
①통일 포기?
임 전 실장의 발제는 "통일, 하지 맙시다"로 시작됐다. 여론 환기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해도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무리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고의적 오독이 아니라면 그의 진짜 주장이 통일 '유보'와 '봉인'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남북 모두에게 거부감이 높은 통일을 유보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합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충분히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와 협력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다음에 통일 논의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분단 장기화로 남북 간 이질감과 격차가 너무 커지자 급격한 통일에 대한 경계심이 일고 있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 예컨대 '굳이 통일이 아니더라도 자유왕래와 경제협력으로 평화공존하다 보면 언젠가 통일의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보수‧진보를 떠나 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물론 통일 유보와 봉인이 통일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남북 적대감이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구조화된 상황에서의 관성적 통일 외침은 오히려 냉소와 역풍을 낳을 수 있다. 이미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여론이 최대치라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②북한 추종?
황진환 기자 보수‧여권에선 임 전 실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추종한다고 비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종북(從北)인 줄 알았더니 충북(忠北)'이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임 전 실장의 과거 전대협 의장 경력을 겨냥한 색깔론이다.
이는 메시지를 흔들기 위해 메신저에 흠집을 내는 수준을 넘어 메시지 자체를 크게 '곡해(曲解)'한 것이다. 임 전 실장은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면서도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분명히 말한다.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 우리의 수용 여부를 떠나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으로 국제사회는 이미 남북을 두 국가로 승인했다. 남북 간에도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두 국가 실체를 인정해왔다. 따라서 현 시점에 진정 중요한 것은 '평화적'이냐 '적대적'이냐의 차이다. 단지 수식어의 차이가 아닌 근본적 관계 규정이다.
따지고 보면 보수‧여권에서도 '두 국가론'이 제기된 바 있다.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올해 초 신문 칼럼에서 "이젠 우리도 남북관계를 애매한 특수관계로 취급하기보다는 차라리 국가 간 관계로 정립해 국제법을 적용하는 것이 남북 협력과 안보 관리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③위헌?
임 전 실장 주장이 '반(反)헌법적 발상'이란 공격을 받는 것은 그가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지우든지 개정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는 여전히 헌법에 남겨두자고 했지만 영토 조항은 워낙에 민감한 사안이다.
두 국가 체제를 수용할 경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헌법 4조)과 대통령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헌법 66조)도 삭제나 개정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조차 위헌적 주장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헌법은 개헌 관련 규정(제10장)을 두고 있다. 통일 문제는 감히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중대사이긴 하나 그렇다고 논의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야 말로 위헌적이기 때문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영토조항 바꾸자는 게 어떻게 반헌법적인 것이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주장하면 반헌법적인 것이냐"고 되물었다.
④유사시 개입 포기?
연합뉴스영토 조항(헌법 3조) 개폐(改廢)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북한 급변사태 때 한국의 개입 가능성에 있다. 비록 선언적‧규범적 차원이긴 하나 한반도 전체가 우리 영토라는 규정을 포기할 경우 강대국 힘 대결에 맞설 명분조차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상당하다.
특히 중국이 북한 유사시 친중정권을 세우거나 아예 직접 통치에 나서 한반도 북쪽을 영구 장악할 것이란 꽤 구체적 전망도 제시된다. 따라서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를 꾸준히 강조하는 게 그나마 최소한의 연고권이라도 지키는 방법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북한 유사시 예상 시나리오와 우리 헌법의 대외적 효력은 면밀하고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북한 급변사태는 김정은 유고, 군부 반란, 인민 봉기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북한이 과거와 달리 상당한 핵 무력을 확보한 이상 외부세력의 개입은 쉽지 않아졌다. 흔히 예상되는 친중 쿠데타도 북중관계가 원래부터 원만치 않았던 데다 김정은 체제에서 친중세력이 크게 약화된 점을 감안하면 회의적이다.
영토 조항의 대외적 효력 여부는 과거 미국과 중국이 구상했던 북한 분할통치 지도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중국 구상에 따르면 한국은 평양을 제외한 평안남도와 황해도만 통제할 뿐이다. 심지어 미국은 한국을 아예 배제하고 일본을 공동 통치에 참여시키는 지도를 그렸다.
물론 국제정치의 불가측성을 감안할 때 미래는 매우 예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영토 규정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북한의 경계심을 자극해 평화와 통일이 더 멀어지는 대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으로선 대남 적개심 고취로 내부통제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별로 나쁘지도 않다.
한 안보 전문가는 "지금으로선 현실성 없는 얘기지만 대북 적대시 정책이 없어야 그들이 정말 어려울 때 우리를 같은 민족, 우군이라 여기고 손을 내밀 것"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두 국가 여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