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임종석 2018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통일 유보론'을 놓고 여권이 일제히 공격에 나선 것은 물론 야권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일단, 많은 고민과 토론이 이어지길 바라며 '도발적 발제'를 했다는 그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한반도와 국제정세 격변을 뻔히 알면서도 기존 통일방안을 고수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의식은 전부터 늘 있어왔다. 다만 분명히 뭔가 바꿔야 한다는 점엔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쉽지 않았다.
임 전 실장은 지난 19일 연설에서 "통일하지 맙시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어 "통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 단단히 평화를 구축하고 이후의 한반도 미래는 후대 세대들에게 맡기자.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했다.
이는 2018년 '한반도의 봄'으로 무르익었던 평화와 통일의 꿈이 참담하게 무너지고, 오히려 어느 때보다 '적대적인 두 국가'가 된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세는 남북과 미중관계 두 측면에서 수십년 새 거의 질적 변화를 겪었다.
임종석 '통일 유보' 발언 논란…"2개 국가로 평화부터 구축, 미래는 후세에"
남북 간 국력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30여 년간 급격히 벌어졌다. 당시 북한은 소련 붕괴의 여파로 '고난의 행군'을 앞둔 시기였지만 지금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반면 남한은 IMF 등 몇 차례 위기에도 눈부신 성장으로 'G7 플러스' 반열에까지 도달했다.
이는 남한으로선 흡수통일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고, 북한으로선 실존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뜻한다. 비교적 대등한 국력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국가연합이나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은 현실성이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고 남한이 실제 흡수통일을 실행할 만큼이나 강력하지는 않다. 북한도 국운은 기울었지만 핵이라는 '만능 보검'으로 최후 안전판을 확보했다. 이대로라면 통일은커녕 칼날 대치 속에 평화 유지조차 힘든 것이다.
여기에다 30년 가까이 미국 일극체제였던 국제질서는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부활로 다극화 했다. 특히 미중 전략경쟁이 사활적으로 전개되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기는 더 어려워졌다.
중국은 한미동맹과 한미일 결속을 더욱 경계하게 됐고 러시아도 북중 밀착으로 돌아서면서 한반도는 탈냉전도 하지 못한 채 '신냉전'의 포로가 됐다. 이제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중동에 이은 제3의 전장이 되지 않기만을 노심초사하는 신세다. 설령 그 불똥이 대만 해협으로 튀더라도 '연루의 위험'에서 안심할 수 없다.
남북격차 확대, 미중경쟁 격화…기존 통일방안 '현실성' 줄어든 것은 사실
연합뉴스남북은 30여 년 전 냉전 종식이란 대격변 속에 유엔 동시가입으로 제 살길을 찾았던 것처럼, 이제 또 다른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11월 미국 대선은 그 '분수령'이 될 것이다.
상황이 이런 마당에 기존 통일방안만 붙들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분단 이후 80년 가까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왔는데 '통일 유보'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지만 그게 냉엄한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우리가 바라보는 남북통일, 통합의 제도화 문제라는 게 현실성이 없다"며 "(임 전 실장의) 문제의식을 전향적이고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실성 없는 통일 구호는 매너리즘이다. 여론을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선 그게 안전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숙제를 후세로 떠넘기는 것을 넘어 상황을 꾸준히 악화시킬 뿐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답을 찾는 노력이 책임있는 자세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무력통일과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며 통일은 후대에 맡기자고 했다"며 "임 전 실장이 말한 것과 비슷한 논리"라고 옹호했다.
헌법 조항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두 국가'로 인식…'하나의 중국' 中과 달라
사실 따지고 보면 임 전 실장의 주장은 2017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독일 쾨르버 재단 연설과 기본 골격은 같다. 문 전 대통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면서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라고 했다.
임 전 실장은 서두부터 "통일하지 맙시다"는 도발적 언사로 주목을 끌었지만 실제는 '통일 포기'가 아니라 '통일 유보'를 주장했다. 헌법에서 통일 관련 조항 삭제나 개정을 언급했지만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는 남겨두자고도 했다.
여권에선 그의 발언이 '북한 추종'이라거나 '반헌법적'이라는 맹렬한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임 전 실장은 '두 국가' 관계를 수용하자고 하면서도 북한의 '적대적' 규정과 달리 '평화적' 관계에 방점을 찍었다. 이는 중대한 차이다.
'적대 → 평화' 전환의 취지에는 눈을 감고 '두 국가'라는 닮은꼴만 지적하는 것은 비생산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해도 국제사회는 이미 별개의 2개 국가로 인식하고 있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
헌법의 한반도 영토 조항이나 통일 지향 조항의 유무와 상관없이, 주변 강대국들이 북한에 대한 남한의 '영토 고권(高權)'을 인정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나의 중국' 원칙으로 대만을 고립시키는 중국은 남북한과 사정이 전혀 다르다.
與 "北 추종, 반헌법적" 맹비난…野도 "설익은 발상 툭 던져" 찬반 나뉘어
다만 임 전 실장의 주장에 다소 과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는 야권 내에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남북 양쪽에 흩어진 혈육과 인연들을 영영 외국인 간의 관계로 만들자는 '설익은' 발상을 갑자기 툭 던질 권리는 남북 누구에게도 없다"고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다수 국민에겐 헌법 내 통일 관련 조항의 대외적 효력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상징적‧심리적 효과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헌법은 3조와 4조, 66조에서 각각 영토 범위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추진, 대통령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규정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서독이 기본법(헌법)에 영토 조항은 넣지 않았지만 국민 범위에 동독 주민을 포함시킨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 전 실장이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부각하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선이 엉뚱하게 쏠린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학자는 (임 전 실장처럼) 그렇게 주장할 수 있으나 현역 정치인의 발언으로는 성급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 말마따나 임 전 실장이 보다 절제된 언어를 구사했다면 어떠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한반도 정세는 어느 때보다 엄중하며 그 달라진 현실에 맞게 국가전략을 짜야 할 책무가 여야 모두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의 중압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