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일본이 부러웠던 시간…'오타니와 기시다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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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같은 WBC 일본 우승의 주역 오타니
겸손한 품성은 존경을 넘어 부럽기까지
윤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이 몰고온 당혹감
한일정상회담을 WBC우승처럼 여기는 일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의문의 1승을 거둔 기시다 총리
두번씩 겪는 열패감은 국민들의 몫

오타니 쇼헤이(왼쪽),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오타니 쇼헤이(왼쪽),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욕먹을 각오하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기자생활 30여년 동안 정치권 취재가 주업무였지만 사실 정치보다는 야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스스로 직업을 공공연히 언론인이 아니라 야구팬이라고 칭해왔다. 그만큼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고 달리 얘기하면 아는게 야구와 정치 밖에 없다.
 
지난 한 주는 야구와 정치 때문에 참으로 설레기도 하고 불편했던 시간이었다.
 
지난주 끝난 2023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는 만화와 같은 일본의 우승으로 끝났다. 
 
MVP가 된 오타니 쇼헤이가 멕시코와의 준결승전 9회말에 선두 타자로 나와 2루타를 칠 때부터 "만화의 시작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과의 결승전 9회초 2아웃 상황은 극적이다. 일본이 3-2로 앞선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선 사람은 오타니. 타석에는 메이저리그 사상 유일하게 12년 총액 4억 달러(약 5천5백억원)가 넘는 몸값을 가진 마이크 트라우트였다.
 
오타니 쇼헤이. 연합뉴스오타니 쇼헤이. 연합뉴스
세계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가 9회 마지막 장면에서 맞붙는 상황이 연출됐다. 두 사람은 LA에인절스에서 한솥밥을 먹기 때문에 맞대결할 일이 없다.
 
결과는 3-2 풀카운트에서 오타니가 던진 140km 슬라이더에 트라우트의 헛스윙 삼진. 그야말로 만화같은 일본의 우승이었고 오타니를 위한 오타니의 오타니에 의한 대회였다. 
 
일본 언론들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이를 생중계했고 21세기 첨단시대에 승리를 전하는 호외를 전국에 뿌렸다.
 
여기에 더해 오타니의 훌륭한 인품은 1차전에서 탈락한 한국을 더 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행운을 줍기 위해 쓰레기를 줍는다'는 오타니의 선행과 상대팀에 대한 존중은 존경심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2006년 WBC대회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까지만 해도 일본 투수들과 한국 투수들은 구속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일본은 트래킹과 바이오메카닉스 등 다양한 기술을 접목한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으로 한국을 멀리 따돌리고 '넥스트 레벨'에 도달했다.
 
한국 선수들과 체격에서 오히려 작거나 비슷한 일본 투수들 중에 150km 이상을 꾸준히 던지는 선수가 1군에만 수십 명에 이른다.
 
어두운 표정의 이강철 감독. 연합뉴스어두운 표정의 이강철 감독. 연합뉴스
반면에 한국에는 안우진(키움 히어로즈)과 고우석(엘지 트윈스) 등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고교야구팀 3,857개와 88개라는 한일 간의 저변을 인정하더라도 10여년 동안 일본야구가 혁신하고 세대교체하는 동안 한국야구는 제자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야구의 미래라는 강백호(KT위즈)는 '세리모니 주루사'라는 어이없는 플레이로 해외토픽이 되고 백억이 넘는 몸값을 받는 김현수(엘지 트윈스)는 경기력과 정신력을 질책한 레전드 선배 선수를 대놓고 비난했다.
 
일본야구가 부러움을 한창 쌓아가고 있을 즈음 전해진 한일정상회담 소식은 답답한 심정만 켜켜이 쌓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른바 '대승적 결단'이 어디서 비롯된 자신감인지 근거를 찾기 어려워서이다.
 
대통령이 대법원의 판결에 아랑곳없이 구상권을 일방적으로 포기하고 일본이 충분히 사과했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국민에게 이해와 설득을 바라는 과정도 없고 정상회담 뒤에 으레 있는 야당 대표 초청 설명회도 없다.
 
그런가하면, 국무회의에서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며 한일정상회담 결과에 공감하지 않는 65% 국민을 대통령의 적으로 돌렸다.
 
"우리가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일본이 절반을 채워줄 것"이라는 박진 외교부 장관의 말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마치 WBC 우승처럼 받아들이는 일본의 분위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
한일정상회담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과 달리 기시다 일본 총리의 지지율은 반등하고 있다. 누가 봐도 현 상황에서 분명한 승자는 일본과 기시다 총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얼마전 국내 정치 상황에서 한 말이다.
 
일본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았고 물컵의 절반을 채워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독도와 멍게가 일본언론에 멋대로 지껄여져도 납득할 해명도 없이 대승적 결단을 했으니 일본의 성의가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자는 말 뿐이다.
 
기시다 정권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종군'이나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박홍근 원내대표, 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난 25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린 '강제동원 해법 및 한일정상회담을 규탄하는 4차 범국민대회'에서 관련 구호를 외치는 모습. 연합뉴스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박홍근 원내대표, 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난 25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린 '강제동원 해법 및 한일정상회담을 규탄하는 4차 범국민대회'에서 관련 구호를 외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이 물컵을 채워줄 것이라며 천수답에 비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은 분명 가야할 길이지만 대통령의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의문의 1승'을 거둔 기시다 총리가 부럽다. 
 
야구와 한일정상회담으로 잇따라 겪는 열패감은 우리 국민들의 몫.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가 오타니 같은 품성을 기시다 총리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야구와 정치는 분명히 다른 영역이니 오타니는 존경하고 기시다 총리는 부러움 정도에서 매조지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지난주 한일정상회담 소식은 잊고 이번 주말 개막하는 프로야구에나 몰두해야겠다.
 
키움 투수 안우진. 연합뉴스키움 투수 안우진. 연합뉴스
우리에게도 안우진 같은 160km에 육박하는 공을 던지는 투수가 있고 장재영(키움 히어로즈) 문동주와 김서현(한화 이글스) 같은 새싹들이 있지 않은가.
 
혹시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관계에 던진 강속구가 제구가 잘돼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후속조치로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날이 오면, 오타니와 기시다 총리 보유국인 일본을 부러워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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