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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노동조합이 승리하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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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의 유서가 남긴 질문

황진환 기자황진환 기자
12년 전 5월의 어느 날, 강원 강릉 정동진의 한 야산에서 34세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동료들은 그의 시신을 서울의 한 장례식장에 안치했다.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이곳에 뿌려달라."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 분회장 고(故) 염호석씨가 유서에 남긴 말이다.

유지는 지켜지지 못했다. 삼성은 친부에게 6억원을 건네며 가족장을 종용했다. 경찰 240여명은 캡사이신 6.18리터를 뿌려 조합원들을 밀어냈다. 시신은 그렇게 급히 운구됐다. 노동조합에 장례를 위임했던 친모는 경찰에 막혀 화장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노동자의 마지막 길조차 통제됐다. 자본과 공권력이 합작한 시신 탈취 사건이었다.

비극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드러난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은 삼성의 무노조 전략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보여줬다. MJ(문제) 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노조 설립 시 주동자를 해고하라. 어용 노조를 세워 조직 확산을 막아라. 노동자의 사생활과 경제적 취약점까지 파고들어 무너뜨리라. 모두 그룹 미래전략실에서 내려온 지침이었다.

2018년 11월, 삼성 반도체 백혈병 분쟁은 11년 만에 합의에 도달했다. 시작은 2007년 3월,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였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한 뒤 급성 백혈병으로 숨졌다. 클린룸 안에서 이름 모를 병을 얻고 스러진 '또 하나의 가족'은 더 있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거리에서 싸웠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같이 비를 맞았다.

조정위원회가 꾸려졌고, 삼성전자는 공식 사과했다. 더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500억원 규모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도 내놨다. 독성물질 관리 체계는 강화됐다. 산업안전 감시는 상시화됐다. 노동자의 안전이 기업의 이윤보다 뒤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합의가 그때 만들어졌다.

2020년 5월,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무노조 경영' 철폐를 공식 선언했다. 경영권 승계와 맞물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 검찰 수사까지 받던 때였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으로 임직원들이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직후이기도 했다. 창업주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던 그 금기가 마침내 무너졌다.

그 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빠르게 성장했다. 2022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노사가 임금협약을 맺었다. 2024년에는 창립 55년 만에 첫 파업을 벌였다. 이제 조합원은 9만 명에 육박한다. 노동자들은 단체교섭권을 행사하고, 쟁의를 선언하고, 사측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한때 삼성에서 상상조차 어려웠던 풍경이다.

노동조합이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일 자체는 정당하다. 성과급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느냐다. 지금 노조 안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은 이익 배분이다. 어느 사업부가 성과급을 더 가져가야 하는가, 영업이익의 몇 퍼센트를 더 배분받아야 하는가를 둘러싼 다툼이다. 반도체 부문의 이익을 다른 부문과 나누자는 내부 제안마저 거부된다.

협력업체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막대한 이익은 본사 정규직의 힘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수많은 협력업체 노동자들과 산업 생태계, 국가의 세제·전력·용수 지원까지 얽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런데도 논쟁은 '우리끼리 얼마나 나눌 것인가'에만 갇혀 있다.

백혈병 분쟁을 매듭짓고 무노조 체제 청산을 이끌었던 김지형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이번 갈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삼성은 국민기업이자 경제를 선도하는 기업"이라며 파업보다 조정과 중재를 권고했다. 그 권리를 만드는 데 가장 깊이 관여했던 사람의 말이었다. 정부 중재로 이틀 간 진행된 사후조정에서 극적 타결은 없었다.

황유미가 원한 것은 성과급 몇 퍼센트가 아니었다. 사람이 부품처럼 소모되다 병들어 죽지 않는 일터였다. 염호석 역시 자신의 몫을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유서의 마지막 부탁은 동료 조합원의 아버지 병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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