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판결문 100건 살펴보니…난무하는 '감형' 꿀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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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성폭력이 시장으로 갔다. 성범죄 사건은 상품이 됐다. 돈만 있다면 형을 줄일 수 있다. '감형'을 파는 성범죄 전문 로펌은 빈틈없는 '감형 시나리오'를 짠다. 많은 돈을 들일수록, 시나리오는 더욱 촘촘해진다. 진지한 반성과 분명한 사회적 유대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반성문, 교육 및 자원봉사 등 각종 장치가 동원된다, 전관예우까지도. 시나리오는 곧잘 먹히고, 감형은 꽤나 쉽다. 실제 살펴본 100건의 판결문이 이를 증명했다. 가해자에게 자애로운 사법제도 아래서 가해자가 법적 처벌으로부터 멀어지는 사이, 피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증명해내야만 했다.

[성범죄, 감형을 삽니다②]

▶ 글 싣는 순서
①"檢출신 변호사 붙여줄게" 성범죄 감형 쇼핑의 민낯
②성범죄 판결문 100건 살펴보니…난무하는 '감형' 꿀팁
(계속)

'4441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A씨가 텔레그램을 통해 '수집'한 미성년자 성착취물의 개수다.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었다. 5년여 간 매일같이 2.5개 정도의 성 착취 영상을 꾸준히 내려 받았고, 하루 세 끼 밥을 먹듯 습관처럼 불법 촬영물을 시청한 셈이다. A씨의 휴대전화는 미성년자 여성이 나체 상태로 성기 부분을 보여주는 영상 등 성착취 영상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A씨의 범행은 더욱 대범해졌다. 직접 성착취물 제작에까지 손을 뻗었다. 2017년 6월 19일, A씨는 자신의 집에서 옷을 다 벗은 채 자고 있는 30대 여성의 전신 사진을 허락없이 찍었다. 2018년 3월 8일에는 숙박업소에서 자신이 20대 여성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했다.
 
 
이런 A씨에게 법원은 집행유예(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를 선고했다. A씨의 노력이 빛을 발한 덕분이다. 법원은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A씨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하고 상담치료를 받는 등 왜곡된 성인식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A씨의 노고를 정상참작해줬다.

 

소감문부터 공부까지…'감형'에 진심인 성범죄자들


CBS노컷뉴스가 지난해 2월부터 11월 사이 서울중앙지법 합의부에서 선고된 성폭력 사건 판결문 중 100건을 살펴본 결과, 성범죄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감형'을 받고 있었다. 시장에서 절찬리에 팔리는 '감형' 노하우를 부지런히 따른 덕이었다.[관련기사:"檢출신 변호사 붙여줄게" 성범죄 감형 쇼핑의 민낯]

특히 성범죄 감형 컨설팅 법인들이 판매하는 '감형자료 패키지'에 필수로 포함되는 '소감문'은 역시나 판결문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고, 이는 곧 감형 사유로 인용됐다.


2021년 B씨는 '자위영상 팝니다, 로리, 중딩, 고딩 자위 등등 다 있어요'라는 게시글을 보고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 122개를 1GB당 만 원에 구매했다. 불법 촬영물 구매가 발각돼 고소를 당하고서도, B씨는 "성착취물인지 모르고 구매했다"며 발뺌했다.
 
하지만 재판에 넘겨지자, B씨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진지한 반성'을 시작했다. '인생계획서부터 가족 사진까지 동원하라'는 성범죄 감형 노하우를 쏙 빼닮은 반성이었다. B씨는 성범죄에 관한 기사를 읽고 이에 대한 소감문을 제출했다. B씨의 가족들도 나섰다. 가족들은 B씨의 재범방지를 도울 것을 다짐하며 선처를 탄원했다. 결국 법원은 "B씨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재범방지를 다짐했다"며 B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또 재판부는 "B씨가 군대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범행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며 개인적인 사정까지도 고려했다.
 
자신의 12세 여자 조카를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 양육하던 C씨가 호소한 감형 사유는 '저학력'이었다. 잠든 조카의 엉덩이를 만지는 등 강제 추행했던 C씨는 감형을 받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법원은 "학력이 낮은 피고인이 이러한 피해자를 적절히 양육할 방법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이로 인한 양육 스트레스가 컸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100건 중 66건은 판사 재량으로 '감형'


실제로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분석한 100건의 판결 가운데 절반이 넘는 66건이 판사의 재량으로 정상참작을 받아 감형(작량감경)됐다. 이 가운데 46건은 '반성·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감형됐다.
 
판결문 안에서 가해자들은 '스스로 아동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하고, '스스로 재발방지교육과 자원봉사활동'을 했고, '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 다짐'했으며, '재범 방지를 위해 성범죄 근절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고, 가족들까지도 재범 방지를 다짐'하기도 한다며 자신들의 '진지한 반성'을 정성스레 증명했다.
 
또한 55건은 전과가 없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5건은 '사회적 유대관계'를 이유로, 8건은 '상당한 금액 지급'이라는 사유로, 51건은 '범행을 인정(자백)'했다는 이유로, 41건은 합의(처벌 불원)을 근거로 감형을 받았다.
 
집행유예를 받은 사례는 실형을 살게 된 사건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100건 중 실형이 선고된 사건은 35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은 64건, 벌금형은 1건이었다.
 
가해자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감형 사유도 다채로웠다. '피고인의 구금이 부양가족에게 과도한 곤경을 수반한다', '피고인은 84세의 고령인 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다', '피고인은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충분한 교육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하였고, 이와 같은 성장 배경이 피고인의 왜곡된 성관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이 배우자와 네 명의 자녀를 부양하고 있다'는 사유들이 판결문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피고인은 아직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 '젊은 나이'라는 이유들까지도 고려됐다. 반면 자신의 사실혼 배우자의 20대 조카를 성추행한 84세 성범죄자는 '고령인 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실형을 피해갔다. 이처럼 다종다양한 가해자의 사정들은 '성범죄' 전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재판 과정에 강조하면 감형 성공으로 이어지는 '꿀팁'으로 전수되고 있다.
 
판사 출신 변호사 D씨는 소감문을 비롯해 기부내역서 등 성범죄 감형 시장에서 절찬리에 판매되는 양형자료가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D씨는 "피해자가 아닌 시민단체에 억대의 돈을 기부했다는 양형자료를 제출한 피고인이 있었는데,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피해자에게 준 것도 아니고 제3자에게 돈을 준 것은 유리한 양형인자로 삼을 수 없다고 보고, 선고를 내렸다"면서도 "그럼에도 내가 선고한 판결이 고등법원에 가서 파기되는 걸 보고 '과연 이런 것까지 유리한 양형사유로 참작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참담했다"고 토로했다.
 

법 개정에 오히려 쉬워진 감형…"양형기준 재검토 필요"

스마트이미지 제공스마트이미지 제공
이에 대해 지난 14일, 대검찰청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대검에 보고된 주요 성범죄 판결문 91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기부 자료나 반복적인 반성문 제출을 근거로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을 인정해 양형이유로 설명한 판결문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검찰이 지난해 6월부터 양형자료에 대한 조사를 적극 실시한 데 따른 결과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통계의 함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판결문에 해당 사유들을 대놓고 적지 않을 뿐, 감형자료를 구매해 제출하는 행위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으니 재판부가 '반성문을 여러 번 보냈다', '기부단체에 기부한 점을 봤을 때'와 같이 명시해서 쓰지는 않지만, 여전히 영향을 미칠 수는 있는 것"이라며 "기부하고 반성문 제출하는 행위가 사라졌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형사공탁 제도가 바뀌면서 '감형 팁'도 하나 더 늘어났다. 지난해 12월 9일 공탁법이 개정돼 피고인이 피해자의 이름, 주소 등 개인정보를 몰라도 공탁금을 낼 수 있게 됐다. 즉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아 개인정보를 알리지 않아도 이와 상관없이 피고인이 공탁금을 낼 수 있는데, 이를 감형 사유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김 소장은 "변호사들은 '가해자들의 작전이 공탁까지 포함한 패키지로 넘어갔다'고 표현한다"며 "일방적인 공탁에는 피해자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데, 법원이 공탁을 합의에 준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양형기준 및 양형자료의 채택에 있어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백소윤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제출하는) 양형자료들은 굉장히 시장화되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야기하는 내용이나 가해자 중심적인 사실관계를 담는다"며 "그 자료들이 감형 근거로 작동하는 것을 피해자가 목격하며 2차 가해를 받거나 사법부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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