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어크로스 제공"인사도 하지마 X년아. 너네들은 다 X년으로 취급받아야 해. 너네는 욕을 먹어도 싸" 욕을 들어야만 마침내 끝나는 지옥이었다. 대전의 한 은행 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진아(43)씨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날 현씨의 동료 A씨는 콜센터에 계좌 한도 제한을 풀어달라고 전화를 건 남성 고객에게 '콜센터에서 (한도 제한을) 풀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전달하고 통화를 마쳤다. A씨의 잘못이 아니었다. 은행 절차상 콜센터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해당 고객이 A씨에게 화가 나 다시 건 전화를 현씨가 받은 것이다. 고객은 '당장 A씨를 바꿔달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현씨는 자신이 A씨에게 수화기를 넘기면 A씨에게 어떠한 폭언이 쏟아질지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콜센터 업무 매뉴얼 상 현씨는 A씨에게 '고객이 재통화를 요청한다'고 전해야만 했다. A씨가 고객과 다시 통화를 해서 욕설을 들어야만, 그 이후에야 고작 블랙 컨슈머 등록을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현씨와 A씨가 번갈아 욕설을 듣고서야 그날의 악몽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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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CBS노컷뉴스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4년 콜센터로 실습을 나갔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다음 소희>의 개봉으로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업무환경이 화두에 오른 가운데,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은 갖은 폭언에 시달려 이제는 '인이 배겼다'고 입을 모았다. 수원 삼성전자 콜센터에서 20년째 근무하고 있는 백영순(52)씨는 여름이 무서웠다. 백씨는 "에어컨, 냉장고 A/S 문의가 쏟아지는 계절이기에 모든 고객의 요청을 시급히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그럴 경우 고객들은 A/S를 왜 바로 못 받냐며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고 욕설부터 내뱉는다"고 말했다.
남성이 아닌 '여성'이어서, 욕설에 더욱 취약하다. 백씨는 "남자가 받는 거랑 여자가 받는 게 다르다. 상위 직급의 남자 직원들이 받으면 확실히 (욕을 하던 고객이) 누그러져 말한다"고 덧붙였다. 대전의 한 은행 콜센터에서 일하는 최초아(39)씨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며 "막 성내고 욕하고 그랬다가도 남자 직원이 전화 받으면 얌전해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이 이 모든 폭언을 감내하는 것은 '성과급' 때문이다. 콜센터 업계는 낮은 기본급을 올려주는 대신, 성과급 경쟁을 부추긴다. 콜센터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2020년 기준 214만 원, 이중 여성 노동자는 205만 원에 그쳤다. 2020년 기준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기본급 외의 성과급에 기대게 되는 것이다.
그 성과급은 '매뉴얼'을 얼마나 잘 준수했느냐에 달려있다. 하루에 받는 전화 수와 더불어 전화를 받을 때 '매뉴얼'을 얼마나 잘 준수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성과급을 좌우한다. 업무 매뉴얼은 '왜곡된 여성성'을 강요한다. '높은 목소리 톤을 유지했는지', '쿠션어(핵심내용을 말하기 전에 하는 부드러운 표현)를 잘 사용했는지' 등이 매뉴얼에 따른 평가 요소이며 곧 성과급 금액과 직결된다.
김성호 부소장은 "친절함, 보살핌, 섬세함 이런 것들이 주로 여성의 특성이라는 잘못된 편견, 그런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요구가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런 것들이 콜센터 (업무 매뉴얼에도) 투영되면서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런 요구가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씨는 "매뉴얼 상 우리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다. 고객이 요구하면 웬만한 건 우리는 다 해야 한다"며 "콜센터 노동자가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고객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하라면 해야 하는 거다"고 말했다. 최씨는 "(고객이 욕을 하더라도) '그렇제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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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콜센터 노동자 대다수가 계약직 또는 간접고용 형태로 채용돼 고용 불안에까지 시달린다. 한 은행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이하나씨는 최근 용역업체가 변경되면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15만 원의 성과급 삭감을 빌미로 조기출근을 강요당하면서도 콜센터를 지켰지만 생계수단을 빼앗겼다"며 "그러나 원청과 용역업체는 모두 책임 회피를 한다"고 덧붙였다.
김성호 부소장은 "콜센터 산업이 형성될 때 단순 상담, 혹은 단순 교환 업무로 시작이 되다 보니 진입 장벽도 낮고 직무 전문성·요구도도 낮은 상태에서 시작됐다"며 "그러다 보니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형태가 고착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지금 소희'들은 멈추지 않고 또다시 수화기를 받아 든다. 직업적 자부심과 보람 덕분이다. 최씨는 "우리가 쉬운 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아무나 하겠다고 달려들 수 있겠지만 누구나 살아남아서 하는 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고, 업무 환경이 개선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 밝혔다. 백씨 또한 "고객들에게 감사 인사 받을 때, '친절하게 상담 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들을 때 직업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콜센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다음 소희>의 '소희'라는 이름은 권여선 작가의 소설 <손톱>에서 따왔다. 해당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소희는 생각 있다. 소희는 생각도 있고 말귀도 잘 알아듣고 매가리, 그것도 있다. 매가리는 힘이라는 뜻이다. 소희는 힘이 세다. 매가리 있다".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