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정부 시절, 길 가다 넘어져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주식에서 손실을 보거나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져도 노무현 탓을 했다.
당연히 과학적 근거가 없음은 물론 정치공학적으로 들여다봐도 황당무계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이 말을 아무 생각없이 중얼거린 이들이 많았으니 가히 역대급 밈(meme)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이 대략 15년을 건너뛰어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게 다 문재인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 중심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북한 무인기 침범과 관련해 "2017년부터 드론에 대한 대응 노력과 훈련, 전력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고 훈련이 전무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영공침범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린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문재인 때문' 화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검찰출신 편중인사 지적이 불거지자
"과거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고 일부 장관 지명자들의 자질 논란이 제기됐을 때는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라고 답했다.
문재인 정부 수사를 놓고 정치보복 논란이 일자
"민주당 때는 안했느냐?"라고 했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두고는
"지난 5년 동안 바보 같은 짓을 했다"라고 말했다.
사실, 현재 정권의 지난 정권 탓하기는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폭등과 관련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간 누적된 부동산 부양 정책 때문"이라는 말을 달고 지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의 책임을 전(前) 정권도 아니고 전전 정권까지 끌어들인 것은 민망한 변명에 불과했다.
무려 25번의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고도 실패한 문재인 정부의 무능함만 강조시키는 역설이 되고 말았다.
2023년 새해 첫 날인 지난 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 중계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윤석열 대통령의 문재인 정부 탓하기는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새 정부의 정책전환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로 '국민통합'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진영이 다른 전임 정부를 자주 공격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고 이명박 대통령도 "노무현 정부 때문"이라고 직접 얘기한 적이 없다.
연합뉴스이번 북한의 무인기 침범 사태만 놓고 봐도, 드론부대는 문재인 정부 때부터 있었고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윤석열 정부 6개월의 책임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反)문재인' 여론을 정치자산으로 삼아 당선됐다. 그렇지만 모든 정책을 이른바 ABM(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뭐든지)로 가는 것은 '협량(挾量)의 정치'로 평가받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때 "이제부터 지난 정부 탓을 하지않고 윤석열 정부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2023년 취임 2년 차를 맞아 정치와 경제, 안보,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책임은 이제 오롯이 윤석열 정부에 있다.
연합뉴스문재인 정부 실패의 기억이 언제까지 윤석열 정부의 까방권(까임방지권)이 될 수는 없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문재인 때문이다" 또는 "박근혜 때문이다"라는 추억의 랩소디가 새해에는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랩소디(Rhapsody)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자유로운 환상곡풍의 기악곡을 뜻한다.
한국정치가 이제 권불오년이라고 한다. 윤석열 정부도 4년 뒤 "이게 다 윤석열 때문이다"라는 랩소디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
전임 대통령의 이름을 갖다붙인 추억의 랩소디는 아무리 정치적 희망과 환상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은 더 이상은 듣기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