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할로윈 압사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애도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서울 이태원에서 압사로 인한 대규모 참사가 발생하기 수 시간 전부터 시민들의 112신고가 쇄도했지만, 행정안전부가 이를 보고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참사 발생 사실도 30분이나 지나서 접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 치안·재난 총괄 기관인만큼 충분히 사고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어떠한 조치도 못 하고 늑장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참사 발행 하루 뒤인 지난달 30일 곧장 "특별히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아니고, 경찰력이 동원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법조계에선 해당 발언을 법조인 출신 장관이 법정 싸움을 의식하고 내놓은 의도된 발언으로 보고 있다. 국가 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사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는가', '적절한 조치를 했는가'가 증명돼야 하는데, 이 장관의 발언은 이를 피하기 위한 성격의 발언이었다는 분석이다.
오후 6시 '신고', 10시 '참사 발생'… 행안부는 10시 48분에 파악
행정안전부가 '참사가 우려된다'는 시민의 첫 신고를 보고 받지 못한 건 물론, 압사 발생 사실도 30분이나 지나서 접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이태원에서 대규모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는 내용의 시민 신고가 처음 접수된 것은 지난달 29일 오후 6시 34분이다.
해당 첫 신고자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이 정체돼 꼼짝도 못하는데,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올라와서 그 골목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끔찍한 생각이 들어 112에 신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 "압사될 것 같다. 끔찍하다"고 경찰에 상황을 알렸다.
오후 6시 34분 최초 신고 이후로도 시민들은 오후 10시까지 계속해 112에 신고했다. 총 11건의 'SOS'였다. 하지만 안전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오후 10시 15분 결국 소방당국에 '압사 발생' 구조 신고가 접수됐다.
행안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에 첫 보고가 올라간 시간은 오후 10시 48분이다. 참사 발생으로부터 33분 뒤이자, 참사를 우려한 시민의 첫 신고가 이뤄진 이후로는 4시간 뒤였다. 이상민 장관은 오후 11시가 넘어 문자로 보고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안부 박종현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은 2일 "소방에 최초 신고된 게 오후 10시 15분, 행안부 상황실로 접수된 게 오후 10시 48분"이라고 말했다.
참사 하루 뒤 '위험 몰랐다'는 이상민…법조계 "법정 싸움 의식한 듯"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이태원 참사 현안 관련 보고를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참사 발생 전부터 시민들의 신고가 빗발쳤고 실제 참사가 발생했는데도, 국가 치안과 재난을 총괄하는 행안부는 상황을 뒤늦게 파악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상민 장관은 참사 발생 다음 날인 곧장 브리핑을 열고서 "이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라며 "통상과 달리 경찰이나 소방 인력이 미리 배치해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 아니라 우려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사고 발생도 예상하기 어려웠다는 취지다. 사과는 없었다.
주무부처 장관이 참사가 발생한 지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과가 아닌 책임 회피성 발언을 내놓은 건 이례적이란 평가와 함께 비판이 쏟아졌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선 판사 출신인 이 장관이 소송을 대비해 전략적 발언을 내놓은 것이란 시각이 강하다.
법조계에 따르면 통상 국가 책임 여부를 가릴 땐 △사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는지 △마땅히 지켜야 할 위험 방지 노력을 했는지 등이 주요 쟁점이다. 이 장관의 당시 발언은 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이태원 참사 현안 관련 보고 전 사과 발언을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 등 국가 상대 배상 소송을 다수 진행한 최정규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장관이 말하는 것은 마치 국가 배상 소송을 당해서 피고 대한민국의 소송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 같다"고 지적했다.
우면산 산사태 당시 서초구청을 상대로 국가 배상을 이끌어낸 김영희 변호사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도 법적인 책임도 안 지려는 발언으로 봤다"고 말했다. 대형 로펌 소속의 한 변호사도 통화에서 "행안부장관이나 용산구청장 등의 발언도 사실 국가 책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들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다만 참사를 우려한 시민들의 사전 신고, 경찰의 부실 대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국가 배상 책임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최정규 변호사는 "경찰의 112신고 묵살은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라며 "공무원의 위법에 따른 징계가 나오면 국가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법원 판례는 공무원이 어떤 구체적인 법령 위반이 아니더라도 신의 성실이나 등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위법 행위라고 본다"라고 봤다.
다만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소송까지 가지 않도록 정치권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김영희 변호사는 "당일 이태원 현장에 일찍부터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나오고 있다"며 "좁은 공간과 밀집 지역에 사람이 많아서 사고가 날 수 있고, 통제가 안되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은 합리적 예측이 가능한 부분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사람이 몰릴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고, 당일 현장을 보면서도 판단 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이나 구청 직원을 보내 질서 유지와 조치도 가능한 부분인데 할 수 있던 조치를 안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