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日은 무시하는 '강제징용배상' 판결…법리와 정치 그 사이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닫기

- +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스마트이미지 제공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손해 배상 판결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자산 매각 결정' 소송의 선고가 결국 미뤄졌습니다. 애초 이달 19일 대법원 선고가 날 것으로 예상됐지만, 재판부는 끝내 이날 판결 선고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간의 과거사 문제는 그 어느 문제보다 정치력과 외교력이 발휘돼야 할 사안입니다. 국제법 등 복잡한 법리 문제를 고려할 때 사법의 영역에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했고, 정치력이 실종된 상황에서 정부는 피해자에겐 "기다려 달라", 재판부엔 "외교적 노력 중"이라며 사법적 판단을 자제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고령의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겨도 이기지 못한 재판… 꿈쩍 않는 일본

잔인한 법원의 시간은 결국 이번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법원은 19일 끝내 '일본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나눠줄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 자신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일본 기업으로부터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받아낸 지 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손해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겨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법원. 연합뉴스대법원. 연합뉴스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 배상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입장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그 간극은 수십 년째 좁혀지지 않고 있기도 하죠.

일단 그간 내려졌던 재판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재판으로는 대법원의 '2012년 5월 24일 판결'이 꼽힙니다.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재판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1965년 맺어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끝났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물론 일본은 강제 징용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렇다 보니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단어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불법 행위인 강제 징용 자체가 없었으니,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논리죠.
 
1965.06.22 한일 청구권 협정 中
제 2조 1항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

제 2조 3항
"(중략)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쉽게 말해 이 협정을 통해 일반 개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도 끝났고, 청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입니다. 일본 사법부도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1997년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에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내자, 이를 근거로 모두 패소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법원은 2012년 새로운 판단을 내립니다.

2012.0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3호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외국 판결 승인 요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일본 판결의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도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의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해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다소 길지만 쉽게 풀어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명백한 불법 행위이고, 강제 징용도 불법임이 명백한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내린 일본 사법부의 판결을 국내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난해 6월 1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관계자들이 일본 기업들에 대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한 1심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지난해 6월 1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관계자들이 일본 기업들에 대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한 1심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어 대법원은 '일반 개인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당시 피해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 즉 개인들의 청구권도 살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2012.0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청구권 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反)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원고 등의 손해 배상 청구권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상당합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정부 간의 정치적 합의일 뿐, 개인에 대한 손해 배상까지 포함하는 협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이 불법 행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맺은 협정인 만큼, 피해자에 대한 손해 배상이 이뤄진 협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강조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이유로 원고(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고, 사건을 돌려받은 서울고법도 2013년 7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미쓰비시가 재상고했지만,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원고 승소로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연합뉴스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연합뉴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명백한 한일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며 버티기에 들어갔고, 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개인들의 손해 배상 청구권이 살아있음은 일본 정부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018.11.14 고노 다로 외무상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에서 본 한일 청구권 협정 중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미 끝났다는 게 일본 주장입니다. 일본이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배상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그 재판이 19일 선고 예정이었던 그 사건입니다.

"국제법 위반"… 대법원 판결에 논란도 명백히 존재 

국가 간의 법리 다툼 성격도 있는 만큼 대법원의 판결을 둘러싼 논란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국제법에 비춰볼 때 무리한 판결이라는 겁니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中 
제26조 "유효한 모든 조약은 그 당사국을 구속하며 또한 당사국에 의해 성실하게 이행돼야 한다"

제27조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선 안 된다"


우리나라도 비엔나 협약에 가입한 상황에서 국내법 논리를 앞세워 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겁니다. 여기에다 일반적으로 식민 지배 보상에 대한 문제는 '일괄 처리 협정(lumpsum agreement·총액 지불 협정)을 따르는 것이 국제적 흐름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이미 개인에 대한 배상도 포함됐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국제법적 논리에 따라 대법원 판결을 배척하고,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국내 재판도 존재합니다.
2021.06.07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재판부
"비엔나협약 제27조 전단은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약을 체결한 당사국이 자국 내에서 제정한 법 또는 선고한 판결 등 국내적 법 사정으로 조약이행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면, 국제 질서의 혼란과 이로 인해 국제 평화를 위협하게 됩니다"

"위와 같은 법리를 토대로 이 사건을 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 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적 법 해석입니다. (중략) 따라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구속됩니다"


"중재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가 대한민국이 청구권 협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하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실종된 정치력과 외교력… 행정부의 의지가 절실한  시점

한일관계. 연합뉴스한일관계. 연합뉴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그 어느 나라보다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제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제의 한반도 침탈, 그리고 사과하지 않는 지금까지의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간 일본 정부의 태도를 고려하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이런 판결을 내렸으니 일본이 따라야 한다' 혹은 '따르겠지'는 우리만의 바람 내지 이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법리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합니다. 정치력과 외교력이 동원돼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위에서 본 중앙지법 민사34부 재판부 역시 "정치적 기관이 더 적합성이 있어 사법 자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사법부에 온전히 맡기기엔 한계가 있다는 토로로 들립니다.

다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이 문제가 양국의 정치가들에 의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겁니다. 피해자들은 이미 고령 등의 이유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말이죠.

피해자들이 참다못해 소송에 나섰지만, 위에서 본 국제법 등 복잡한 법리를 고려하면, 또 일본의 무책임한 버티기를 생각해보면 이 문제를 법정에서 사법 논리 만으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피해자들과 사법부에 맡길 것이 아니라, 책임 소재가 분명한 일본 그리고 이를 압박할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통상부는 미쓰비시의 자산을 현금화할 것인지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임박한 지난달 26일, 대법원에 '우리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보냈습니다. 사실상 재판부를 향해 사법적 판단을 늦춰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렇다고 마땅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자,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쉽지 않은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사법부에  전가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존재 의미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부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0

0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본 뉴스

      실시간 댓글

        상단으로 이동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다음 카카오채널 유튜브

        다양한 채널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제보 APP설치 PC버전

        회사소개 사업자정보 개인정보 처리방침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