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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8500억 빚 탕감 후 100억대 주식투자…몰락한 재벌의 수상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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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시가총액 600억원이 넘는 한 코스닥상장사의 현재 최대주주가 과거 신흥 재벌로 불렸던 '갑을그룹'의 박창호 전 회장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룹 연매출 1조원을 웃돌 정도로 큰 성장을 거뒀던 갑을그룹은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사태 등을 겪으며 몰락했습니다. 당시 박 전 회장 또한 채무가 수천억원에 달했는데, 2012년 개인 회생을 통해 채무 약 8500억원을 탕감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문제는 그 직후 수억원씩 주식을 계속 사들이더니, 결국 한 코스닥상장사의 최대주주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입니다. 주식 구입에 사용된 금액만 100억원이 훌쩍 넘는 규모입니다. 취재 결과 과거 갑을그룹이 재정 악화로 위기를 겪고 있던 시점 전후로 박 전 회장이 부인 등 가족 명의로 자산을 빼돌린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당시 빼돌린 돈이 현재 주식투자의 시드머니가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됩니다. CBS노컷뉴스는 박 전 회장이 주식 구입에 사용한 자금 출처를 추적해 봤습니다.

[몰락한 재벌 회장의 재기 자금 추적기①]재기의 발판, '은닉자산' 의혹

▶ 글 싣는 순서
①[단독]8500억 빚 탕감 후 100억대 주식투자…몰락한 재벌의 수상한 부활
(계속)

시가총액 600억원이 넘는 코스닥 상장사 (주)정원엔시스의 현재 최대주주가 과거 재벌그룹 '갑을'을 이끌었던 박창호 전 회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갑을그룹은 한때 국내 계열사 15개, 해외 계열사 10개 등을 이끌며 연매출 1조원을 웃돌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 재계 순위 50위권에 오르며, 신흥 재벌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고, 분식회계로 인한 수천억원대 사기대출 혐의가 적발되면서 몰락했다. 당시 그룹 전체가 도산하면서 박 전 회장 또한 채무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등 사실상 파산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다.

정원엔시스 건물. 구글 지도 캡처정원엔시스 건물. 구글 지도 캡처
하지만 현재 박 전 회장은 정원엔시스의 최대주주에 이름을 올리는 등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난 2012년 개인 회생을 통해 채무의 약 99.8%(약 8500억원)를 탕감 받은 것이 주효했다.

문제는 회생 직후 수억원대 지분투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사들인 주식만 백억원어치가 훌쩍 넘는다는 점이다. 막대한 자산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투자 방식이다. 회생 직전 돈을 은닉해 뒀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급작스러운 재산 증식이 가능했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재산 은닉'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박 전 회장의 주식 구입에 투입된 막대한 시드머니는 어디에서 왔을까.

8천억 중 24억만 갚아…현금 300만원 있다더니 갑자기 생긴 '48억'

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이 제출한 회생계획안. 수원지방법원 제공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이 제출한 회생계획안. 수원지방법원 제공
25일 CBS노컷뉴스 취재와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실 자료를 종합하면 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은 2011년 7월 수원지법에 "가진 재산에 비해 채무가 너무 과다하다"고 호소하며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 관계인 조사 등으로 확정된 박 전 회장의 채무는 약 8547억원에 달했고, 박 전 회장 명의로 된 재산은 약 9억원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현금은 약 300만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본인 명의로 된 시세 4억원의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 골프회원권·콘도회원권·호텔피트니스회원권이 약 5억원에 달했다.

박 전 회장은 이들을 모두 처분함과 동시에 부인 명의의 서초동 아파트 및 현금 4억5천만원을 더하고, 월 500만원의 급여 소득을 통해 2018년까지 약 7년에 걸쳐 최대한 갚을 테니 채무를 탕감해 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법원은 채무 약 8547억원 중 약 24억원만 박 전 회장이 변제하고 나머지 약 8523억원에 대해서는 면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박 전 회장은 이 같은 회생계획안이 통과하자 조기 변제를 신청했고, 한 달만에 24억원을 모두 갚아 2012년 5월 4일 회생절차 종결 결정을 받았다.

문제는 회생절차가 종결되고 약 3개월 뒤부터 박 전 회장 명의로 수억원대 지분 구입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취재진이 확보한 '(주)템피스투자자문'(이하 템피스) 주주명부에 따르면 2012년 8월부터 박 전 회장의 이름이 등장한다. 템피스는 과거 갑을그룹이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 업체로 선정되는 등 몰락하고 있던 시점인 1998년 설립된 회사로, 설립 자본을 댄 이들 중 한 명이 박 전 회장의 부인 최모씨였다.

초기 이들은 최씨와 두 딸 명의로 템피스의 지분 5만주(5억원)를 갖고 있었는데, 2012년 8월 10일 박 전 회장과 막내딸이 추가되면서 '최씨 외 4인'이라는 이름으로 최대주주 자리에 오른다. 이때 추가된 지분만 3만8450주(3억8450만원)로 확인됐다. "돈이 없다"며 수천억원의 채무를 탕감 받았는데, 약 세 달 뒤 본인과 딸 명의로 수억원대 지분을 사들인 셈이다.

심지어 박 전 회장이 회생 결정을 받기 위해 마련한 현금 24억원의 출처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회생계획으로 제시한 박 전 회장 명의의 토지·건물 등이 처분되지 않았고, 부인 명의의 서초동 아파트도 팔리지 않은 시점이었다. 골프·콘도·호텔피트니스회원권 등을 모두 처분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다.

그럼에도 약 7년 동안 갚겠다던 채무는 개인 회생 결정이 난 뒤 한 달 만에 변제됐고, 회생 절차는 불과 두 달만에 종결됐다. 허덕이며 채무를 갚아나가는 일반적인 회생 절차와는 딴 판이었던 셈이다.

템피스투자자문 최대주주 변동일지. 금융투자협회 전자공시 제공템피스투자자문 최대주주 변동일지. 금융투자협회 전자공시 제공
박 전 회장 일가의 지분 투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약 4만주(4억원) 상당의 템피스 지분을 추가로 구입했고, 2015년 약 5만2천주(5억 8천만원), 2016년 2천주(2천만원), 2017년 1만5천주(1억5천만원), 2018년 약 2만9천주(2억9천만원), 2019년 6만5천주(6억5천만원) 등 매년 꾸준히 수억원대 지분을 구입한다.

이들 일가는 총 29만3350주(29억3350만원)를 확보, 전체 지분의 63.25%를 보유하면서 템피스의 최대주주 자리를 견고하게 지켰다. 박 전 회장의 이름이 등장한 시점부터 따지면 투입된 금액만 24억원이 넘는다. 회생 당시 조기 변제를 위해 마련한 약 24억원을 합하면 총 48억원의 자금이 새롭게 생겨난 셈이다.

2015년부터 '기업 인수' 시작…6년만에 백억대 투자로 상장사 최대주주


박 전 회장 일가는 템피스의 최대주주가 된 이후 본격적으로 '기업 인수'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2015년부터 코스닥 상장사 '정원엔시스'의 주식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 전 회장 일가는 조금씩 주식을 사 모으더니 현재는 정원엔시스의 기존 회장 일가 지분 보유율을 뛰어넘어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박 전 회장 일가의 정원엔시스 주식 구입 사실이 최초 공시상에 드러난 시점은 2015년 3월이다. 당시 박 전 회장의 부인 최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주)윔스' 명의로 41만9011주, 최씨 명의로 43만1807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같은 해 10월 윔스와 최씨, 그리고 세 딸 명의로 주식을 사들여 총 186만4530주(6.45%)를 보유하게 된다. 당시 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들이 구입한 주식은 약 27억원에 달한다. 이렇게 부인과 딸들, 윔스 명의로 주식을 사 모으다가 2016년 9월부터는 박 전 회장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 시작한다.

박 전 회장은 이후 본인과 부인, 딸들, 그리고 본인과 특수관계에 있는 법인들 명의로 주식을 계속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 규모는 매년 수억~수십억원에 이른다. 2020년 4월에는 본인이 최대주주로 있는 '템피스' 명의로 한번에 약 50억원어치(331만2152주)의 주식을 구입하기도 했다.
정원엔시스 최대주주 현황.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제공정원엔시스 최대주주 현황.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제공
결국 박 전 회장의 지분 보유율은 2021년 12월 정원엔시스 기존 회장 일가의 지분 보유율을 뛰어 넘게 된다. 올해 3월 31일 기준 정원엔시스의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주식소유 현황'에 따르면 '박창호 외 특수관계인 10인'은 총 717만8346주(22.29%)를 보유하면서 최대주주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원엔시스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 지 불과 6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몰락한 과거 재벌 오너가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고 봐야 할까.

공시에 따르면 박 전 회장이 319만650주(9.91%)를 소유해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박 전 회장의 부인 최씨와 동생 박모씨, 세 명의 딸, 그리고 '윔스', '템피스', '자산장학재단', '이콜로지앤푸드', '신한화섬'의 5개 법인들이 나눠 보유하고 있다. 전부 박 전 회장 또는 가족들이 소유한 법인들이다. 이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를 시가로 따지면 약 135억원에 달한다.

정원엔시스는 지난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이른바 '윤석열 테마주'로 꼽히면서 주가가 주당 5천원대까지 급상승한 바 있지만, 그 외 기간에는 평균 주당 1~2천원 사이를 오갔다. 따라서 박 전 회장 일가가 주식 투자에 들인 비용 역시 현재 시가와 비슷한 135억원 안팎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가진 재산에 비해 채무가 과다하다"고 호소해 법원으로부터 회생 결정을 받아 약 8500억원을 탕감받은 사람이 회생 직후 한 투자회사의 지분을 구입해 약 30억원 규모의 지분을 보유하더니, 100억이 넘는 금액을 투입해 코스닥 상장사의 최대주주까지 오른 것이다. 박 전 회장이 회생 전 가족 등 명의로 자산을 빼돌려뒀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취재진이 여러 차례 박 전 회장에 질의했지만 박 전 회장 측은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룹 연매출 1조 넘었던 갑을그룹…문어발식 경영과 IMF 사태로 몰락

한편 갑을그룹은 1950년대 섬유 사업을 중심으로 박재갑, 박재을 형제에 의해 만들어져 제조업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해 고공 성장을 한 기업집단이다. 1970년대 (주)갑을, 갑을견직, 갑을방적, 갑을건설 등을 세우면서 사업 다각화를 진행했다.

1982년 박재갑 회장이 사망하면서 장남인 박창호 회장이 뒤를 이었다. 이후 1988년 박재을 회장 일가가 일부 계열사를 맡아 '갑을합섬그룹(현 KBI그룹)'으로 독립하면서 기존 갑을그룹은 박창호 회장이 단독 경영을 하게 됐다. 이후 박 회장은 영남일보, 갑을전자, 갑을금속 등을 인수·설립하면서 영역을 더 넓혔다. 한때 국내 계열사 15개, 해외 법인은 10개까지 늘어나 그룹 연매출은 1조 2천억원을 웃돌기도 했다.

하지만 문어발식 경영과 수익사업 부재,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사태 등을 겪으며 몰락했다.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갑을은 회생하지 못하고 결국 2003년 회사정리절차를 밟게 된다. 반면 독립한 박재을 회장 일가가 이끈 KBI그룹은 살아남아 현재에도 영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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