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 일가의 경기도 양평 별장 모습. 서민선 기자연매출 1조원을 웃돌며 '신흥 재벌'로 불리다가 IMF 외환위기 사태로 몰락한 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이 그룹 도산 직전 개인 자산을 가족 등 명의로 은닉,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2012년 회생 절차를 통해 채무 약 8500억원을 탕감 받고 직후 100억대 주식 투자에 나서 현재는 한 코스닥 상장사의 최대주주에 오른 사실이 CBS노컷뉴스 연속 보도로 드러난 가운데, 예금보험공사(예보)에서 박 전 회장에게 받아내야 할 채권 1억원이 17년 동안 회수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이 채권은 지연손해금 약 3억원이 추가돼 박 전 회장이 갚아야 할 돈은 총 4억원이 넘는 상황이다. 취재가 시작되자 해당 채권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한 예보는 뒤늦게나마 법률적 검토를 거쳐 회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박 전 회장이 2012년 법원으로부터 회생 판단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 회수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예보, 1억 손배채권 17년간 회수 못해…뒤늦게 "법률 검토중"
예금보험공사 답변.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실 제공
28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은 1995~1997년 그룹의 핵심 회사인 (주)갑을의 재무제표를 조작하고, 1997년 갑을방적(주)의 재무제표를 조작하는 '분식회계'를 지시했다. 회계장부 가결산 마감 결과 수십~수백억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흑자를 기록한 것처럼 거짓 장부를 작성하라고 시킨 것이다.
박 전 회장은 이렇게 작성된 허위 재무제표를 공시했고, 이를 여러 금융기관에 제출해 공적자금 약 4200억원 상당을 대출받았다. 또 1995년부터 자본잠식에 빠져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 계열사 4곳에 약 2200억원을 부당지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검찰 특수부의 수사로 드러났다.
결국 박 전 회장은 특경법상 사기·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2003년 7월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고, 같은 해 10월 실형 3년을 선고받는다. 이후 2심에서도 실형 3년이 유지됐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고, 파기환송심에서 사기 대출 금액이 일부 줄어들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이후 허위 재무제표에 속아 갑을그룹에 대출을 해줬던 채권단 중 우리은행과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서울보증보험, 현대생명보험 파산관재인, 예금보험공사(동남은행의 파산으로 예보에서 파산관재) 등이 박 전 회장과 경영진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05년 10월 법원은 박 전 회장과 경영진 등이 연대해 우리은행에 37억, 조흥은행에 2억, 서울보증보험에 10억, 예보에 1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다.
문제는 예보가 1억원의 손해배상채권을 1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취재진이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실을 통해 예보에 문의한 결과 예보는 "박창호에 대한 손해배상채권에 대해서는 철저한 '부실 책임 추궁'(잘못된 경영에 대한 책임을 엄하게 따져서 밝히는 일)을 위해 회수 노력 지속 중"이라고 답했다. 지난달 16일 기준 지연손해금만 3억 3100만원까지 늘어난 상황이다.
예보 관계자는 "박창호씨가 2012년 법원에서 회생 절차가 종결됐는데, 그 당시 손해배상채권에 대해서는 신고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신용정보사에 위탁해서 채권 회수를 하고 있는데, 신용정보사에서 2015년 해당 채권에 대한 지급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며 "전산상 해당 채권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박창호씨가 회생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해당 채권을 당시 법원에 신고하지 않았더라도 (법률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현재 여러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무심의에서 해당 사안에 대해 법률 검토를 하고 있다. 최종 심의에서 법원 소송으로 다퉈볼 수 있다고 판단이 내려지면 바로 보존 조치하고 회수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無항소'…법원은 사기액수 줄자 '실형→집유'
갑을그룹 박창호 전 회장이 회생 이후 주소지를 옮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연립주택. 서민선 기자 한편 당시 분식회계로 인한 공적자금 사기 대출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박 전 회장은 약 1년간 옥살이를 한끝에 2004년 7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같은 해 11월 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다. 그러다가 2007년 2월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 살리기와 국민통합' 명목으로 사면된다.
박 전 회장은 어떻게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을까. 당시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1심에서 총 4200억원까지 인정됐던 사기 금액은 대법원을 거쳐 파기환송심에 이르면서 약 2800억원까지 줄어든다. 이유는 약 1400억원에 대해선 허위 재무제표를 통한 기망 행위와 대출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기 액수가 줄어든 점이 집행유예를 받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직접적으로는 각 피해 금융기관에게 수십, 수백억원의 피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금융기관의 부실화로 인해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결국 국민 전체에 대해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했으므로 무거운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다만 피고인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매년 생산한 제품의 85% 상당을 수출하는 등 그동안 수출역군으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온 점, 편취액이 모두 회사의 기존채무 변제나 회사 운용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고 이를 개인적인 용도로 은닉하거나 임의 소비한 흔적은 보이지 아니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집행유예의 배경에는 검찰의 '無항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박 전 회장이 1심에서 실형 3년을 선고받자 항소하지 않았다. 박 전 회장은 1심 선고를 받은 날 즉시 항소장을 제출했는데, 검찰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셈이다.
항소하지 않은 이유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선 파악할 길이 없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데다가 당시 수사 및 공소제기 검사들이 대부분 퇴직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CBS노컷뉴스는 박 전 회장이 2012년 약 8500억원을 탕감 받은 뒤 100억대 주식 투자에 나선 사실을 보도해 '자산 은닉'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단독]8500억 빚 탕감 후 100억대 주식투자…몰락한 재벌의 수상한 부활) 또
은닉된 자산이 과거 갑을그룹 도산 직전 빼돌려뒀던 개인 자산인 정황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관련 기사 : [단독]'8천억 탕감후 백억 주식투자' 회장, 가족 명의 부동산·법인 수두룩)
전문가들은 해당 의혹이 모두 명확한 사실로 확인될 경우 '사기회생죄'로 처벌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용호 도산 전문 변호사(법무법인 율빛)는 "재산을 고의적으로 은닉하고 회생을 받았다면 사기회생죄에 해당한다"며 "채권단은 채무자가 채무 초과 상태라고 믿고 회생계획안에 동의를 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