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춘 인천해양경찰서장(왼쪽)과 윤형진 국방부 국방정책실 정책기획과장이 16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인천해양경찰서에서 각각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과 추가 설명을 마친 뒤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2020년 9월 서해 북단 소연평도 바다에서 실종됐다가 북한 경비정 총탄에 피격돼 살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 사건을 두고 여야 진실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와 비교했을 때, 2022년 6월 22일 현 시점에서
새로 공개된 사실관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경의 판단은 달라졌다. 당시엔 도박빚 등을 근거로 월북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지만 지금은 월북으로 볼 명확한 증거가 없단 얘기다.
국방부가 당시 분석했던 특수정보(SI)가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수는 있지만, 이를 공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SI 자체가 갖고 있는 민감성 때문이다.
도박빚 그리고 '월북 의사 표명'…추가 근거 없는데 2년만에 뒤집힌 결론
2년 전 발표 당시 해경은 이씨가 출동 전·후와 출동 중에도 수시로 도박을 하는 등 인터넷 도박에 깊이 빠져 있었다며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 도피 목적으로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해경 발표를 종합하면 A씨는 실종 직전까지 억대의 인터넷 도박을 했고, 금액은 1억 2300만원에 달한다. 분석 결과 그가 최근 15개월간 도박 계좌로 591차례 송금을 한 것과 함께 각종 채무로 개인회생 신청과 급여 압류 등이 이뤄진 사실도 파악됐다.
이밖에 침실에서 보관하던 구명조끼 가운데 한 벌이 없어졌고, 부유물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으며 북한 선박을 만났을 때 인적사항을 밝히고
월북 의사를 표명한 점도 근거로 들었다.
연합뉴스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관련 사항을 설명한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표류하던 상황에서
일단 살기 위해 월북 의사를 표명했을 수도 있지 않나'는 질문에 "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구명조끼를 착용했고 신발(슬리퍼)을 유기했으며, 소형 부유물을 이용하고 월북 의사를 표명한 정황이 식별된 점으로 볼 때
자진 월북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이씨의 가족들은 사건 당시부터 현재까지 실족 가능성이 높다며, 이씨는 월북자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대표적으로 이씨의 형 이래진씨가 "어업지도선에는
고속단정이 있어 이걸 내려서 갔다면 편하게 (북한에) 갈 수 있었을 텐데 30시간 이상 멍청하게 헤엄쳐서 갔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2년 가까이 지나 해경은 결론 자체를 뒤집었다. 지난 16일 박상춘 인천해양경찰서장은 "국방부 발표 등에 근거해서 피격 공무원의 월북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월북 의도를 인정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말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보안상의 이유를 대며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왜 해경의 결론이 뒤집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SI가 뭐길래?…북한군 무전 등 동향 감시해 생산한 민감정보
진실의 열쇠가 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는 국방부가 분석한 SI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 국방과학기술용어사전은 SI의 정의에 대해 "적에게
누설될 경우 군사작전 및 군사정보 활동에 치명적인 위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어 그 출처와 내용이 은폐된 정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신호나 통신 주파수 등의 감청, 위성 촬영, 공작원 등을 비롯한 특수한 방법으로 수집된 첩보(information)와 함께 이를 분석·평가한 정보(intelligence)를 일컫는다.
군사기밀은 1·2·3급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작전계획이 보통 2급 비밀에 속한다. 그런데 SI는 비밀취급인가를 받고 나서도 별도의 SI 취급인가를 받아야 열람이 가능하다. 때문에 각 부대에는 SI를 다루는 방이 따로 있으며 이 방은 아주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된다.
군 관계자는 "정보부대에서 SI를 생산해 그 정보가 필요한 일선 부대에 전파하는데,
지휘관 이외엔 열람이 불가능한 경우도 흔하다"고 귀띔했다.
어쨌든 이번 사건에서 언급되는 SI는 우리 군과 미군 정보부대가 무전을 감청하거나 그 이외의 방법으로 북한군 동향을 감시한 내용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씨가 생전에 북한군에게 월북 의사를 표명했는지 등의 여부는 이 SI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
SI 공개하면, 북한도 수단 바꾼다…수십년 쌓아온 노하우 무용지물 우려
윤형진 국방부 국방정책실 정책기획과장이 16일 오후 인천 연수구 인천해양경찰서에서 2020년 9월 21일 발생한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최종 수사 결과와 관련해 추가 설명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문제는 이 SI를 공개하는 일이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언제 어떻게 교신을 주고받았는지 공개한다면, 자신들의 통신 가운데 어느 부분이 감청되는지 알게 돼 주파수와 통신 수단 등을 모두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은 사건이 벌어지고 한 달 남짓 지난 2020년 11월 3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통신망 이용이 대폭 줄었다. 통신을 잘 이용하지 않고 있다"며 "음어 체계가 좀 변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시점은 정치권에서 몇몇 SI를 공개하면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였다. 실제로 SI가 정치인들을 통해 언론에 보도되는 일에 대해 국방부도 우려를 표명하는 등 당시에도 문제가 됐었다.
군대 무전은 감청을 당하더라도 내용이 100%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꿔서 사용하는데 이를 음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중대'는 '백두산', '2중대'는 '한라산' 같은 식이다.
북한군도 당연히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우리 입장에선 어떤 음어가 무슨 단어에 해당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감청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그 방법은 내부 협조자 등 사람일 수도 있으며 또다른 기술적인 수단일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분석관들이 동원돼 대화의 맥락을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만약 우리가 SI를 공개하게 되면, 북한군은 어떤 통신수단이 어떻게 노출됐는지를 파악하게 되고 그 수단을 모조리 바꿔버릴 수 있어 첩보 수집과 정보 분석·평가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내부 협조자가 있다면 그를 찾아내 제거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려, 북한군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SI는 한미가 함께 분석해 생산하는데…"공개했다간 북한만 이득 본다"
피격 해수부 공무원 A씨에 유가족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윤 변호사, 친형 이래진 씨, 피살 공무원 배우자. 황진환 기자한미동맹 차원에서의 문제도 있다. SI를 생산할 때는 미군이 보유한 위성이나 특수정찰기 등으로 첩보가 수집되면, 그 분석과 평가를 한국군이 맡는 식으로 한미가 공동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군은 최첨단 정보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수집을 잘하며, 한국군은 북한과 언어와 문화가 비슷해 분석 등을 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SI가 공개되고 나면, 앞으로는 미군이 관련 사항 유출을 우려해 한국군에 첩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미가 공동으로 생산한 한미연합비밀은 미군도 동의해야 공개가 가능한데 미군이 여기에 동의할지도 미지수다.
공군 정보장교 출신인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SI는 한미가 가장 민감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인가된 소수의 한미 분석관에 의해 분석되고 공유된다"며 "그게 오픈되는 순간 그간 구축했던 정보시스템뿐만 아니라 한미 정보공유체계도 다 망가져 북한만 득을 보게 된다"고 썼다.
쉽게 말해 우리가 정쟁 때문에 민감한 군사정보를 함부로 공개하게 된다면, 미군이 우리를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제대로 된 공유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는 이야기다.
윤석열 대통령도 21일 아침 출근길에 기자들 질문을 받고 "SI는 국민들께 그냥 공개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걸 공개하라고 하는 주장 자체는 좀 받아들여지기가 어렵지 않나 싶은데, 한 번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