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판매 중인 밀가루. 연합뉴스국내 산업계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됐던 러시아의 원자재 수출금지 대상에서 한국 기업은 제외됐다. 다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의 긴장 국면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에너지는 물론이고 식량 부문으로까지 여파가 번지며 물가상승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러 수출금지 피했지만…널뛰는 가스가격, 타격 불가피
러시아 정부가 지난 12일 발표한 특별경제조치는 비우호국의 31개 회사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통제를 골자로 한다. 천연가스 무역계약 체결을 포함한 거래와 의무이행은 물론이고 제재 대상자를 수혜자로 하는 금융거래 수행도 금지된다. 또 제재 대상자에게 러시아산 제품과 원자재를 수출하는 것도 금지다.
다행히 우리나라 기업은 제재 대상에서 빠졌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Gazprom)의 독일법인을 통한 가스공급부터 끊기로 했고, 가스프롬의 영국·프랑스·미국·스위스·싱가포르 등의 자회사도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의 천연가스 판매·공급 기업이 제재대상에 포함됐다.
서울시내 다세대주택 가스계량기의 모습. 박종민 기자산업통상자원부는 한국가스공사가 제재 대상 31개 회사와 기업간 거래가 없는데다, 한국의 천연가스 부문 대(對)러시아 의존도는 지난해 기준 6% 수준으로 낮아 이번 조치로 인한 직접적 영향권엔 들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유럽 천연가스 수급을 바짝 줄인 이번 조치로 인해 현재도 고점인 천연가스 가격이 계속 치솟을 위기에 놓였다. 이에 따른 연쇄적인 비용 상승과 경영 불확실성 등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특별경제조치 발표와 이에 대한 영미권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금지 등 경제 패권을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이달 초 들어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헨리허브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100만BTU(열량단위)당 8달러를 넘어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헨리허브는 북미지역의 천연가스 가격지표로 통한다.
앞서 지난 겨울 유럽연합(EU)의 천연가스 가격지표인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100만BTU당 32달러를 기록하며 과거 5년간 동기 평균 대비 5배 이상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널뛰는 에너지 가격은 물가상승 압력을 부추기고 구매력 감소를 야기한다. 불확실성 증가와 자본조달의 어려움으로 투자를 멈추게 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정귀희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문원은 "유럽에서 LNG 수입 필요성이 확대되면서 이미 수급이 타이트한 올해 세계 LNG 시장에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며 "러-우 전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이 가스 수요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길어지는 전쟁…경유·식용유·밀가루까지 '물가 대란'
15일 서울시내 한 주유소에 휘발유와 경유 판매가격이 써붙어 있다. 연합뉴스천연가스는 물론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이 길어지면서 다른 에너지 가격도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휘발유 가격이 2000원 선을 넘나드는 가운데, 경유 가격이 휘발유값을 앞지르는 현상까지 발생한 것이다.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을 역전한 것은 2008년 이후 14년 만에 처음이다.
16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5월 둘째 주(8~12일) 전국 평균 경유 가격은 전주보다 32.8원 오른 1939.7원을 기록했다. 코로나19로 메이저 정유사들이 경유 생산을 줄인 상황에서 경유를 쓰는 디젤차 비중이 높은 유럽은 러시아와의 에너지 거래가 끊기며 가격이 치솟고 있다.
당장 국내 화물차 업계는 사실상 '적자 운행'을 할 처지라며 보조금 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화물차와 택시 등 경유차량을 운전하는 생계형 사업자에 대해 유가보조금을 추가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외에도 러-우 사태로 국제 식량가격이 치솟자 일부 국가들의 자국 식량보호주의까지 확산돼 물가상승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팜유를, 인도는 밀가루 수출을 중단하면서 가격 상승을 우려한 자영업자들이 사재기에 나서기도 했다.
식용유와 밀가루 가격이 치솟으면서 국내 식품 물가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15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이용객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한국의 경우 인도네시아보다는 말레이시아산 팜유를 주로 수입하고 있고 인도산 밀가루 수입도 많지 않아 단시간 내 직접적인 영향은 없지만, 소비자 체감 경기에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