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권말이면 으레 '순장조'라는 말이 나온다. 왕이 죽으면 살아있는 신하를 함께 매장하는 고대사회 순장(殉葬) 풍습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정치에 빗대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보좌한 청와대 측근과 공무원들은 다음 정권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역대 정권들을 돌아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정권 재창출을 못하면 '어공' 핵심은 감옥에 가거나 '늘공' 중 일부는 소속 부처로부터 버려지거나 아예 옷을 벗는게 숙명이었다.
그러니, 대통령 선거를 앞두면 어공이나 늘공이나 한결같이 "대선에서 지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대선 전에 "집권하면 적폐청산 수사를 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이 말을 접한 문재인 정부 청와대 직원들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 연합뉴스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27일 한 방송에서 "퇴임 후 문재인 대통령을 걸고 넘어지면 물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순장조를 자처한 사람이 하는 말이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신구 권력이 역대급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자연스레 '정치보복'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권력이 구권력을 수사할 때 최근 직권남용죄가 단골처럼 등장한다.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타인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켜 생기는 죄다. 상하 관계가 뚜렷한 한국 공직사회에서 직권남용죄는 '걸면 걸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020년까지 직권남용 혐의로 고소.고발된 사건은 5만 건이 넘는다. 박근혜 정부 때의 2배를 훨씬 넘는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 때 직권남용죄가 '전가의 보도'처럼 쓰였기 때문이다.
이 칼을 가장 많이 휘두른 사람은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다. 그러나, 직권남용죄를 무리하게 적용한 탓인지 최근 사법농단 사건 등에서 무죄 판결이 속출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일선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도 28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석열 당선인의 "적폐청산 수사" 발언에 대해 문 대통령이 분노했다고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이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분노하고 우려하는 지점은 아마 직권남용일 것이다. 집권한 뒤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했던 대통령이 적폐청산 수사의 위협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수사를 주도했던 검찰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된 역사적 아이러니가 펼쳐져 있다.
문 대통령을 건드리면 "물어버리겠다"는 탁현민 비서관의 말이 미래에 대한 암시로 들리는 것은 과도한 추측일까.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입장하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검수완박 입법독재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고있다. 윤창원 기자떠날 정권이 임기말에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으로 신구 권력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물릴 것을 우려해 신권력의 이빨을 미리 뽑아버리려는 의도로 해석되는 상황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에 유일하게 견제받지 않은 권력인 검찰의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권 빼앗긴 뒤 다급하게 추진하는 검수완박이 물리지 않으려고 먼저 물어버리려는 몸부림으로 비쳐져 씁쓸하다.
세상은 돌고도는 것. 한국정치에서는 '권불십년'이 아니라 '권불오년'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횡행했던 직권남용죄와 블랙리스트 수사가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문 정부를 겨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일 터. 결국 5년 뒤에 누가 무는 입장이 될지 물리는 처지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떠나는 권력에서 나온 "물어버리겠다"는 말이 무섭기는 커녕 측은하게 들린다.
윤석열 정권에도 5년 뒤 분명 순장조가 있을 터. 행여라도 '물어버리겠다'는 식의 말은 들리지 않기 바란다.
5년 마다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를 다시듣기해야 하는 한국정치와 국민이 너무나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