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앞에 시민들이 보낸 편지와 카드, 꽃다발 등이 놓여 있다. 김형준 기자지난달 24일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소식을 입수하기가 가장 쉬운 전쟁이기도 했다. 국제부로 파견돼 관련 기사를 쓰면서, 각종 SNS를 통해 여과 없이 전송되는 사진과 영상 등 참상은 사실 맨정신으로 보기 힘든 장면들이었다. 기자도 이럴진대 침공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인들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던 와중 SNS에서 우연히 어떤 글이 눈에 띄었다. "현재 방탄-방편성능이 있는 방탄모, 방탄복은 대단히 부족하여 시급히 요청중에 있습니다. 실제로 기능하거나 방탄판 삽입으로 사용이 가능한 장비가 있다면 아래 주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모든 것이 부족한 우크라이나에서 시민들이 입고 싸워야 할 군복, 방탄복, 방탄헬멧 등 개인전투장비가 턱없이 부족해 방문 또는 택배로 기부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0년쯤 전 군 생활을 했던 기자는 이른바 '개구리'라 불리는 구형 녹색 얼룩무늬 군복 세대로, 지난해 예비군을 마치고 민방위에 편입됐다. 이 군복은 우리 군에서 더 이상 쓰지 않아 현용과 달리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외국군에서 지금은 쓰지 않아 방출된(이른바 '서플러스') 군사장비를 좋아하는 취미를 지녔기에, 많지는 않지만 집에 방탄복 등도 있었다. 같은 취미를 즐기는 오래된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5명 정도가 집으로 장비를 보내주었다.
기자는 지난 8일 커다란 박스 3개와 대형 전투용 배낭을 차량에 직접 싣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우크라이나 대사관으로 향했다. 물품을 직접 기부한 뒤, 한 대사관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SNS에 정보를 올리기 시작했던 A씨 또한 접촉해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군사 매니아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장비 기증
지난 8일 기자가 직접 기부하기 위해 준비한 물품들(왼쪽)과 이를 실제로 대사관에 기부한 뒤 촬영한 사진(오른쪽). 기자가 실제 입었던 구형 예비군복과 함께, 대부분 오래되어 방출된 외국군용 구형 장비들이다. 김형준 기자지난 1일부터 트위터에 관련 정보를 올리기 시작한 A씨는 처음에 시민들이 무턱대고 대사관을 찾아가는 일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침공이 발발하자 온정의 손길이 잇따랐지만, 여건이 제한돼 있는 대사관 입장에선 우선순위가 높은 물자들이 있기에 이런 내용을 전달받아 안내하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대사관은 외국 공관들이 으레 그렇듯 본국에서 파견된 외교관들과 소수 한국인 직원들이 일하는 구조다. 문제는 침공 사태로 업무가 많은데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인원은 적어 이런 일을 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A씨가 도움을 받아 만들어, SNS에 올린 이미지A씨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하루 10여시간씩을 들여 영어로 우크라이나 대사관과 소통하고, 어떤 물자가 우선순위가 높으며 어떻게 우크라이나로 보내지는지 등을 전달받아 한국어로 번역해 SNS에 올리고 있다.
군사 관련 취미는 국내에 저변이 그리 넓지는 않은 관계로 A씨 트위터 팔로워는 1천여명이 채 못 되는 정도다. 하지만 기자가 대사관에 도착해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서 30분 정도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투복, 전투화, 벨트' 등 목록이 겉면에 쓰인 상자들이 택배로 대사관에 배달되고 있었다.
개중엔 꼭 군용뿐만 아니라 민간업체가 만든 전투장비도 있고, 아이들이 입을 옷, 생리대 등 위생용품이 담긴 상자들도 있었다. 기자와 마주친 한 택배기사는 "요즘 이 근방으로 배달되는 택배는 대부분 우크라이나 대사관으로 온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아마추어 무선연구반 YARRA가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기부한 무전기. YARRA 제공며칠 뒤 대사관에 휴대용 무전기 4대를 기부했다는 연세대 아마추어 무선연구반 'YARRA' 임원진을 화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마추어 무선(HAM)은 과거 휴대전화 보급 전엔 인기 있는 통신수단이었지만, 현재는 한켠으로 밀려난 상태다.
하지만 전쟁통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휴대전화는 기지국이 있어야 동작하며, 위성전화는 비싸다. 최근 스페이스X가 우크라이나에 위성 인터넷망을 제공하긴 했지만 드넓은 우크라이나 땅 모든 지역에서 와이파이가 잡히진 않는다.
무전은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우며 특히 모든 것이 부족한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상 군용 암호화가 되어 있지 않은 무전기라도 꼭 필요하다.회장 김원준 학생은 "사실 대형 HAM 장비도 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돼서 오작동할 수 있기에 휴대용 무전기를 기부했다"며 "여러 기반시설이 파괴돼 통신이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면 현지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고 기부 취지를 설명했다.
기술부장 정귀영 학생도 "전시엔 기지국 같은 대형 인프라가 무너지게 마련인데, 이럴 때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마추어 무선이다"며 "통신이 발전한 시대에 마이너한 취미가 되긴 했지만, 맥이 끊기지 않게 한다는 취지를 갖고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물자 부족한 우크라이나, 한국에도 지원 요청했지만 정부는 "검토 중"
우크라이나 대사관 근처 한 카페. 대사관 관계자는 기자에게 "A씨는 본인이 자원해서 해당 일을 시작한 것이 맞다"며 "덕분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많이 알게 됐다. 한국 은행에 기부를 받는 계좌도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본래 민간인 총기 소지가 금지돼 있지만, 이번 침공 이후 누구든 원하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받을 수 있게 됐다"며 "문제는 장비다. 보호장비가 모자라 청바지에 운동화를 걸치고 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일단 거칠고 험한 전장에서 민간인 복장으로는 제대로 싸우기 어렵다. 게다가 국제협약상 합법적으로 무기를 들고 싸우며, 생포되더라도 전쟁포로로 대우받을 수 있는 '교전권'을 인정받기 위해선 3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명확한 지휘체계가 필요하고, 무기를 공공연히 휴대해야 하며,
통일된 제복과 휘장을 착용해야 하는데 바로 맨 마지막이 문제다. 사복을 입고 전투를 하다가 생포되면 스파이 또는 테러리스트로 간주돼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군복마저 이런 판국이니 방탄복과 방탄헬멧 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방탄장비는 총탄 직격뿐 아니라 포탄 등 파편을 막는 효과가 있어 꼭 필요하다.
대사관 관계자는 "아주 작은 도움도 우리에게는 정말 고맙다. 예를 들어 초코파이 같은 경우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면서도 "
물자를 둘 공간은 제한돼 있고, 보호장비는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의 생명이 달렸기에 최우선적으로 기부를 받아 전장으로 보내고 있다. 전장에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지혈대 같은 의료용품과 함께 전투식량도 시급하다"고 했다.
현지에 식량 자체가 모자라지는 않지만, 조리가 필요없이 곧장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그 외에
자외선(UV) 손전등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러시아 첩자들이 자외선 도료로 주요 목표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기부받아 대사관 안에 쌓여 있는 물자들은 항공편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로 옮겨져 전장에 투입될 예정이다. 약 50kg 정도가 얼마 전 처음으로 출발했는데 방탄복 9벌과 헬멧 4개 등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다만 개인 기부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현재 전 세계를 대상으로 민간 회사와 정부 등에 요청해 관련 물자를 기부 또는 판매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방부 부승찬 대변인은 지난 7일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군사적·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들을 발송했으며 이를 접수했다. 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지원 방안에 대해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다"면서도 "소총 등 살상무기 지원은 제한된다. 외교적으로 논의되는 사안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드리기 제한된다"고 답했다.
외교부 제공다음 날 외교부는 항공편을 통해 긴급의료품 40톤을 현지로 보냈다.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단 1천만 달러 규모로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대형 전력 건설도 중요하지만…직접 총 들고 싸우는 '개인전투장비' 신경써야
이번 침공은 그동안 대형 플랫폼 건설에 치중하고 개인전투장비 발전에는 소홀했던 우리 군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좋은 전투복과 방탄헬멧, 방탄복을 지급하고 응급처치·통신장비 그리고 교육에 신경써야 한다고 야전 군인들과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 군은 세계 6위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 해 쓰는 예산도 55조원 안팎으로, 돈 쓰는 데 인색한 군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문제인데 방위력개선비 가운데 많은 부분이 대형 전력 도입에 투자되기 때문이다.
항공모함과 같은 대형 전력은 현시(show of force)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체만으로도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그 나름대로 필요하다. 전면전 상황에서도 당연히 큰 위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더 발생 가능성이 높은 소규모 전투나 저강도 분쟁 등이 벌어지면 보병이나 특수전 부대에 의한 전투가 주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전면전 상황이라도 적 수뇌부에 접근해 생포 또는 제거하거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깃발'을 꽂고, 추후 상황을 안정시키며 치안을 유지하는 일은 결국 총 든 보병이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상자도 생길 수 있기에 응급처치는 당연히 배워야 한다. 또 작전 중 유기적으로 상황을 공유하면서 원활한 지휘를 하려면 통신장비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군 실상을 보면 전투복엔 불에 타는 것을 막는 방염 처리가 돼 있지 않으며 방탄복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못하고, 방탄헬멧엔 계급장을 부착하는 구시대적 방식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개인전투장비 개선 사업 '워리어 플랫폼' 일환으로 보급된 장비는 실사용하는 총기가 아니라 창고에서 더 보기 쉽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더 발전해야 하는데, 임무에 맞는 장비 보급을 기다리다 못해 미국 등 민간 업체에서 만든 장비를 사비를 들여 구입해 사용했다가 지휘관 눈총을 받았다는 이야기들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성능이 검증된 장비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라 "통일성을 해치고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지난해 9월 육군이 기자들에게 공개한 소프트웨어 기반 무전기(SDR)와 삼성 갤럭시 S20을 기반으로 만든 전술용 스마트폰. 스마트폰은 디지털 무전기를 통해 통신망을 제공받고 아군 위치와 작전 목표 등을 사용자에게 알려주며, 메시지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 김형준 기자소대급 이상 무전기는 사람 몸통만한 경우가 허다하며 개인휴대 무전기는 소수만 보급돼 민수용 무전기, 그마저도 없으면 훈련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시에 암호화되지 않은 무전기나 스마트폰은 역추적을 당할 우려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군 당국도 이를 모르진 않아서 무전기를 소형화해 보급하는 계획 자체는 있지만, 일부 특수부대나 정예부대, 시험평가 부대 등에만 지급돼 아직은 구경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무장비와 교육도 개선해야 한다. 우리 군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처에 붕대를 감고 심폐소생술을 하는 법 등 민간에서나 볼 법한 응급처치를 주로 가르쳤다. 하지만 전장에서 무턱대고 부상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한다고 총상을 처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는 군 병원이 아니라 이국종 교수가 이끄는 아주대 외상센터가 우리나라에서 총상을 가장 잘 치료한다는 웃지 못할 결과를 낳았다. 2017년 판문점을 통해 귀순한 오청성씨도 이 곳에서 치료받았다. 국군수도병원 외상센터는 2020년 9월에야 문을 열었다.
미 해군 특수부대원이 애니(의료 실습용 모형)를 상대로 TCCC를 실습하는 모습. 미 국방부 영상정보시스템 캡처미군은 2000년대에
전술적 전투 사상자 처치(TCCC)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미군 특수부대원 출신 군의관이 처음 개발해 미 응급구조사협회(NAEMT)와 국방부 승인을 획득했는데, 위험한 전장에서 어떻게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지 다루는 시스템이다. 뿐만 아니라 전훈과 임상논문 등을 반영해 이를 계속해서 수정보완하는 TCCC 위원회가 있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적 공격이 아직 계속되는 경우, TCCC 가이드라인에서는 섣불리 부상자를 구하러 가지 말라고 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화력이 줄어들게 되며 적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을 때 그랬다간 사상자가 더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상자는 혼자서 팔다리에 지혈대를 감는 등 처치가 가능한 경우 그렇게 하고, 어렵다면 일단 적을 제압한 뒤에 부상자를 구하러 가야 한다.
이런 개념을 적용하려면 혼자서도 팔다리에 감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지혈대가 필요하며, 모든 인원이 응급처치키트를 어떻게 자신 또는 동료에게 사용하는지 교육받아야 한다. 즉
TCCC를 의무병만이 아니라 모든 장병들이 배워야 한다.전투 부상자 처치 교육을 받고 있는 육군 장병이 동료의 다리에 지혈대를 감고 있다. 육군 페이스북 캡처우리 군도 준비기간을 거쳐 올해 '전투 부상자 처치'라는 이름으로 이런 개념을 도입했다. 모 부대 현역 군인들이 사비를 들여 외국에서 배워 왔다가 군 전체로 확대됐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장병들에게 이런 키트가 돌아가지는 못하며 포함된 물품도 미군에 비하면 수량과 품질 등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팔다리 출혈을 막는 지혈대의 경우 미군은 반드시 TCCC 위원회가 성능을 검증해 승인한 제품만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 군은 그런 절차를 두지 않고 있어 납품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품질이 열화될 수 있다.
의사·간호사, 전직 군의관·의무부사관·병들이 분쟁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기 위해 만든 비영리단체 GSMSG가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해 인터넷에 배포한 TCCC 교본.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교육 시스템 또한 간부들이 집체교육을 받은 뒤 다시 각 부대에서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 될 필요가 있고, 교육을 하다 보면 소모될 수밖에 없는 교보재를 충분히 보급해야 한다. 내용도 임상논문 등을 반영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최전방까지 바로바로 전달되게 할 필요가 있다.
육군 특전사령관을 지냈으며 본인도 TCCC 교육을 수료한 전인범 퇴역 중장은 "현대 군인은 3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실전적인 사격술과 근접격투능력 그리고 본인과 동료가 다치면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응급처치"라며 "TCCC를 아예 신병훈련소 등에서부터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모든 인원에게 교육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집체교육 방식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실제 전투병에게 교육을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간부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