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연합뉴스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스스로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내로남불'이란 표현 사용을 지난해 4.7보궐선거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다가, 이번 대선에서는 현수막이나 플래카드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은 지난 22일 선관위로부터 받은 질의서 답변을 공개했는데, 선관위는
"내로남불·무능·위선·신천지·주술·굿판'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일반 선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정당·후보자의 명칭·성명이 특정되는 것으로 쉽게 인식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정 후보나 정당이 명확하게 유추되거나 연상되지 않기 때문에 해당 표현들을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당시 '투표가 위선을 이깁니다. 투표가 무능을 이깁니다. 투표가 내로남불을 이깁니다'라는 문구 사용이 가능한 지를 묻는 국민의힘 사무처의 문의에는 '내로남불·위선·무능'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했었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같은 문구에 대한 선관위의 판단이 180도 뒤바뀐 것이다. 국민의힘 측은 당시 선관위가 '특정 정당(후보자)을 쉽게 유추할 수 있거나, 반대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했었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1년 전만해도 '다 안돼'
지난해 4.7보궐선거 당시만 하더라도 선관위의 허용 범위는 상당히 협소했다. 표현의 전후맥락과 당시 상황까지 고려해 조금이라도 특정 후보나 정당이 연상될 경우, 모두 불허 판단을 했다.
'정직한 후보에게 투표합시다'란 표현도 불허됐는데, 특정 후보를 연상시키거나 반대하는 의미가 내포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내곡동 처가 땅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거짓말 논란이 불거졌는데, '정직한 후보'가 곧 오세훈 후보를 반대하자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게 당시 선관위의 내부 해석이었다고 한다.
또 '보궐선거 왜 하죠? 우리는 성평등한 서울을 원한다'는 문구도 불허됐는데, 당시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범죄 사건으로 시장직이 공석이 됐던 점을 연상시킨다는 게 사유가 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표합시다'는 미래당을 연상시키고, '이번에 투표해'는 후보자 기호 2번을 연상시켜서, '일찍일찍 사전투표'는 기호 1번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불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김성기 기자선관위 "비판과 개선 요구 있어서"
특정 표현을 허용할지 말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공직선거법 제90조 등에 근거한다. '정당의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사진 또는 그 명칭·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명시한 것'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행위로 보고 금지한다는 법률 한 문장이 전부다.
결국 모호하고 추상적인 법률 속에서 선관위가 고무줄 잣대로 사안을 판단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런 경험들이 쌓여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역 사거리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한형 기자경기대 류홍채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현수막 관련 논란은 구체적으로 내용적인 부분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 규정 등이 점차 발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에 보낸 답변서에서 "공직선거법 제90조가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비판과 제도 개선 요구가 있었다"며 "이러한 점을 고려해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폭넓게 보장하기 위하여 현수막 관련 법규운용기준을 마련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선관위는 지난해 4월 '시설물.인쇄물을 이용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 확대'의 취지로 공직선거법 제90조 등을 폐지하는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본회의를 통과하자 못해 법률상 변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