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9일부터 사업장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때 임금명세서를 함께 주도록 의무화됐다. 단순한 변화 같지만, 실제 노동현장에 미칠 '나비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확 줄어들 임금 체불 사건…근로감독 새 바람 불까
박종민 기자이번에 임금명세서를 반드시 교부하도록 법이 바뀌면서 기대되는 가장 큰 변화는 임금체불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임금 체불은 우리나라의 노동 현장에서 가장 흔한 골칫거리로, 노사 문화가 진전하기 어렵게 만드는 암초와 같은 문제다.
참여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는 비록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사태로 41만명에 그쳤지만, 그 전까지는 매년 증가하며 50만 명 후반대를 유지해왔다. 임금체불액도 계속 늘어 2019년 1조 8391억원에 달했다. 또 노동자가 직접 임금체불을 신고한 사건도 매년 늘어서 최근에는 약 20만건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 현장을 지키는 근로감독관들도 임금체불에 발목이 잡혀 정작 산업보건 안전, 노사 갈등 해소 등 근로감독 제도 본연의 업무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근로감독관의 과로 문제는 좀처럼 해법을 찾기 어려운 골칫거리였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가 근로감독관 인원 충원에 심혈을 쏟은 덕분에 2006년 1272명, 2016년 1694명에 그쳤던 근로감독관 수는 올해 7월 3122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그만큼 일감도 늘면서 근로감독의 품질을 높일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로감독 체계를 마비시키고 있는 주범이 바로 임금 체불 문제다.
그런데 임금체불은 사용자의 경영 악화로 인해 빚어진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사안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한국기업데이터 자료에서 2015~2017년 임금 체불 사업자 12만 1371명을 분석한 결과, 사업자를 기준으로 경영위기나 도산과 같은 경제적 요인으로 임금을 체불한 일은 겨우 19.9%에 불과했다. 뒤집어 말하면 노동자 당사자와 다퉜다는 이유로, 혹은 수당 등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를 잘 알지 못해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비경제적 요인이 80.1%에 달했다는 얘기다.
특히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체불 사실을 노동자가 입증하려 해도 관련 자료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존 근로기준법에서는 사용자가 임금대장을 작성하도록 할 뿐, 정작 임금대장의 내용 등을 노동자에게 제공하도록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임금명세서를 받지 않으면 자신의 세전 임금이 얼마이고 어떻게 책정됐는지, 실제 일한 노동시간에 맞는 적법한 임금을 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물론 임금명세서가 본격적으로 교부되기 시작하면 노동현장에는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예를 들어 근로계약서 역시 2012년부터 반드시 노동자에게 교부하도록 정했지만, 아직도 이를 지키지 않는 사업장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임금명세서는 근로계약서보다 훨씬 내용이 복잡하고, 임금을 줄 때마다 새로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자로서는 부담이 더 크다.
또 일단 임금명세서가 나눠지면 노동자가 매달 임금이 제대로 지급됐는지 곧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보다 임금 체불을 문제삼아 신고하는 사례가 당연히 크게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임금명세서 교부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중장기적으로는 임금 체불 문제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구 결과에서 사용자가 지급의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상습체불한 사례만 8%를 넘었는데, 이런 경우는 사용자가 임금명세서를 작성하며 수당 산정 기준 등을 익히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전에는 노동자가 임금 체불 여부조차 제 때 알기 어려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제삼다 보니 수년 전의 노동시간 등을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노동자가 임금 체불 여부를 곧바로 알 수 있고, 노동자의 임금명세서를 근거로 노동시간 등을 계산할 수 있어서 근로감독관의 사건 처리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성신여대 법학부 권오성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임금 체불 관련 분쟁이 늘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임금 체불 분쟁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며 "그렇다면 기존의 근로감독관의 업무가 임금 체불의 과중한 업무에 매였던 것이 다른 제도·분야의 문제를 다루고, 산업 현장도 자주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겨 근로감독의 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내다봤다.
이어 "임금명세서에 근로시간을 적으려면 관련 사항이 더 명확해질 수밖에 없고, 그동안 암묵적으로 지나왔던 탈법적 관행들이 드러날 것"이라며 "예를 들어 서비스 잔업으로 불리는 무급 연장근로 등이 눈앞에 드러나면 이런 관행을 자제하게 하면서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긍정적인 영향도 미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임금체계 단순화 논의에도 힘 실릴 듯…임금명세서 사각지대 해결 숙제는 남아
스마트이미지 제공좀 더 나아가면 복잡하게 구성된 우리나라의 임금체계를 단순화하자는 논의에도 다시 힘이 실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 임금체계는 대부분 기본급 외에도 성과급, 상여금, 연장·휴일·야간·숙일직수당 및 각종 수당 등으로 복잡하게 짜여있다. 사용자는 기본급을 인상하는 대신 수당을 신설해 법정수당 부담을 피해갔고, 노동자도 손쉽게 실수령액을 늘릴 수 있다는 이유로 노사 간의 암묵적인 담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명세서를 나눠갖다 보면, 사용자도 임금 체계를 복잡하게 두면서 합법적으로 임금을 지급하기 부담스럽고, 노동자로서도 임금을 제대로 받은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다만 비록 사업장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사업장에 의무로 부과됐지만, 여전히 임금명세서를 제대로 교부받기 어려운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우선 애초에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자, 특고)나 프리랜서, 플랫폼 종사자 등은 '임금' 대신 수수료나 운임 등의 이름으로 돈을 받기 때문에 임금명세서 교부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만다.
더 나아가 명백히 임금노동자임에도, 서류상에는 노동자로 취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법 규제를 피하기 위해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장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를 서류상 개인사업자로 위장시키는 이른바 '가짜 3.3' 수법이다.
노동시민단체 권유하다 정진우 사무총장은 "지금 정부와 언론이 점검해야 할 일은 임금명세서를 '누구에게' 발행하느냐의 문제"라며 "임금을 지급해 일을 시키면서도 노동자를 4대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게 하거나, 도급·위탁·용역 계약을 맺어 사업소득세(3.3%)를 납부하는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칫 이들이 임금명세서를 받지 않는 노동자 아닌 존재로 낙인이 찍힐 수 있다"며 "이런 사각지대에서 배제되는 노동자가 없도록 노동부의 행정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