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동차 반도체 시장은 오는 2030년까지 올해보다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독일 IAA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팻 겔싱어 인텔 CEO. 인텔 제공인텔이 미국에 이어 유럽에도 파운드리 공장을 신설합니다. 대규모 투자 계획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는 인텔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꾀하는 미국을 든든한 뒷배로 두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쏠린 반도체 제조 편중을 해소하고, 미국 내 생산을 늘리겠다'는 미국 정부의 전략은 인텔과 TSMC, 삼성전자가 펼치는 글로벌 파운드리 '삼국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글로벌 자동차 반도체 수급난…코로나19에 '미래차' 전환 때문
연간 30만 대의 완성차 생산능력을 갖춘 현대차 아산공장은 쏘나타와 그랜저를 생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홈페이지 캡처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은 지난 9일부터 이틀 동안 생산 라인 가동을 멈췄습니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로 현대모비스가 현대차에 공급하는 모듈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13일부터 지난달 8일까지 가동을 중단한 지 불과 한 달 만입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은 현대차만의 일은 아닙니다. 전세계 주요 완성차 브랜드 모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의 GM은 이달 들어 2주간 북미공장 15개 중 절반이 넘는 8곳의 가동을 중단했고, 포드도 캔자스시티공장을 2주간 멈췄습니다. 일본의 도요타는 이번달 글로벌 생산 목표를 애초 90만 대에서 54만 대로 대폭 줄였습니다.
최근 독일 뮌헨에서 열린 IAA(독일국제자동차전시회) 모터쇼에 참석한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은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했습니다. 유럽 최대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의 헤르베르트 디스 최고경영자(CEO)는 "여름 휴가철 이후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코로나19 재유행으로 다수 공장이 문을 닫은 바람에 여전히 차질을 빚는다"고 말했습니다.
폭스바겐의 헤르베르트 디스 최고경영자는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를 "정말로 큰 우려"로 묘사했다. 연합뉴스최근 다시 불거진 반도체 품귀 현상의 일차적인 원인은 아시아를 덮친 코로나19 재유행입니다. 폭스바겐을 비롯해 주요 자동차 제조사의 하청업체가 밀집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는 델타 변이가 확산하며 락다운(봉쇄) 조치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동차 업계의 반도체 부족 현상이 지난해부터 이어져 왔고, 이른 시일 안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상반기 코로나19 유행으로 자동차 판매가 급감하자 네덜란드·독일 등 유럽과 일본의 차량용 반도체 기업들은 차량용 반도체 대신 소비자 전자기기로 눈을 돌렸습니다. 수익성이 낮고 결함 발생과 리콜의 위험성이 있는 차량용 반도체 대신, 스마트폰·PC·TV·가전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반면 전기·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상용화로 차량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내연기관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엔진과 자동 브레이킹 시스템, 에어백, 자동 주차 시스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차량의 핵심 요소 전부를 제어합니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코로나19에 따른 일시적인 수급 불균형 차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든 업체가 있습니다. 바로 글로벌 파운드리 '삼국지'의 한 축으로 떠오른 인텔입니다.
모터쇼에 등장한 인텔 CEO "반도체 부족 해결 위해 유럽에 투자"
지난 2월 인텔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팻 겔싱어는 이번 IAA에서 처음으로 대면 기조연설자로 나섰습니다. 반도체 회사 수장의 모터쇼 참석이 어색하지 않도록 겔싱어는 자회사인 모빌아이가 개발한 자율주행차에 직접 탑승해 뮌헨 도심을 누빈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모빌아이는 완전 자율주행시스템이 탑재된 상업용 AV(Autonomous Vehicle)를 업계 최초로 공개했다. 내년 독일에서 자율 로보택시 서비스가 시작된다. 인텔 제공겔싱어는 "'모든 것의 디지털화'로 인해 프리미엄 자동차의 원가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2019년 4%에서 2030년 20%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글로벌 자동차 반도체 시장은 오는 2030년까지 두 배 가까이 성장하며 전체 반도체 시장의 11% 이상을 차지하는 1150억 달러(약 135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자동차 반도체 시장의 성장을 "엄청난 도전이자 거대한 기회이며 인텔이 한 발 더 나아가기에 완벽한 시기"라고 설명한 겔싱어는 "반도체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창출되는 새로운 시대는 대담하고 커다란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며 본론인 유럽 투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인텔은 최대 800억 유로(약 110조 원)를 투자해 유럽에 새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지난 3월 200억 달러(약 23조 4000억 원)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 2곳을 신설하고 35억 달러를 투자해 뉴멕시코주 공장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지 6개월 만에 나온 대규모 투자 계획입니다. 인텔은 또한 자동차 업계를 위해 아일랜드 공장의 제조 역량을 차량용 반도체 부문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인텔은 3월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한 직후부터 유럽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마침 유럽연합(EU)은 차세대 디지털 산업에 1500억 달러(약 175조 원)를 지원하기로 한 터였습니다. 겔싱어는 독일과 벨기에를 방문했고,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의 정치 지도자를 접촉했습니다. 겔싱어는 "인텔이 더 많은 반도체 공장 건설을 계획 중이며 아시아로 반도체 제조가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국가안보' 관점에서 반도체 접근한 美 "공급망 재편 필요하다"
지난 인더독 5편 기사 "돌아온 인텔…시스템반도체도 '삼국지' 재편되나"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텔은 초미세 공정 전환의 실패로 반도체 업계의 '왕좌'에서 내려왔습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반도체 회사' 자리를 엔비디아에 내줬고, 올해 2분기에는 2017년·2018년 이후 3년 만에 매출 기준 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사 지위를 삼성전자에 넘겼습니다.
지난 2월 행정명령 서명 직전 공급망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상하원 관계자를 만난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칩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위기의 인텔이 오히려 과감한 투자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다름 아닌 미국이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4대 핵심 품목의 '공급망'에 대해 100일간 검토를 진행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습니다. 모두 코로나19 대유행 등과 맞물려 수급에 어려움을 겪은 품목입니다. 당시 외신은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가 이 행정명령의 핵심 이유라고 전했습니다.
100일간의 검토를 거쳐 미국 현지시간으로 지난 6월 8일 공개된 백악관 보고서의 제목은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 미국 제조업 진흥과 폭넓은 성장 촉진(BUILDING RESILIENT SUPPLY CHAINS, REVITALIZING AMERICAN MANUFACTURING, AND FOSTERING BROAD-BASED GROWTH)'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코로나19 국면에서 경제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단기적 공급망 차질 대응을 위해 범정부적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각 분야별 대책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전체 250쪽에 이르는 보고서에서 반도체만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백악관은 먼저 "반도체는 전자 장치의 필수적인 부품으로, 냉장고에서 전투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제품군에 널리 퍼져 있다"면서 "세계 반도체 생산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1900년 37%에서 오늘날 12%로 떨어졌고 정부의 포괄적인 지원 전략 없이는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제합니다. 반도체의 쓰임새는 갈수록 커지는데 생산 측면에서 미국이 소외돼 있다는 진단입니다.
보고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권고(Recommendation)도 반도체 분야는 단순명료합니다. △의회는 첨단 반도체의 국내 제조를 증진하기 위해 최소 500억 달러(약 58조 원)를 지원한다. △제조·산업·국방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및 메모리 반도체의 생산을 늘린다. △미국 내에서 차세대 반도체가 개발·생산되도록 연구개발(R&D)을 촉진한다.
美반도체 업계의 목표는 "미국 내 생산 늘려 아시아 편중 해소"
이처럼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린다'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의 핵심은 '아시아 편중' 해소입니다. 백악관의 행정 명령에 따라 SIA(미국반도체산업협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가 지난 3월 정부에 제출한 '반도체 제조와 패키징 공급망의 위험' 보고서에 이 문제의식이 잘 담겨 있습니다.
SIA에 따르면 글로벌 분업화가 체계적으로 이뤄진 반도체 시장에서도 특정 지역이 65%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분야가 수십 곳입니다. 전 세계 반도체 제조능력의 75%는 '높은 지진활동과 지정학적 긴장'에 노출된 중국과 동아시아에 몰려 있습니다. 심지어 차세대 기술인 10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공정은 대만의 TSMC가 92%, 삼성전자가 8%로 전부를 차지합니다.
반도체 제조의 특성상 각 지역별로 공급망을 자체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SIA는 반도체를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적으로 선행 투자에만 최소 1조 달러(약 1170조 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습니다. 더불어 매년 운영비만 1000억 달러가량이 들어갑니다. 모든 반도체 제품의 가격은 최고 65%까지 치솟게 됩니다.
SIA는 결론적으로 "미국 의회의 500만 달러 인센티브 프로그램은 필수 품목 반도체의 미국 내 소비를 충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산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고 평가했다. SIA 보고서 발췌"아시아에 쏠려 있는 게 문제지만 우리가 다 생산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필수적인 몫만 우리가 책임지겠다." 미국은 중국과 함께 각각 25% 안팎의 점유율을 가진 세계 최다 반도체 소비국입니다. 25%에 해당하는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60개의 파운드리 시설이 새로 필요하다는 추산이 나옵니다. 국가 안보와 정부 운영 등에 꼭 필요한 만큼인 7%의 자체 생산 추진이 결론으로 제시된 이유입니다.
미국 내 파운드리 시설 늘리는 삼성전자와 TSMC
우리의 관심은 이같은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이 삼성전자에 미칠 영향입니다. 백악관의 100일 보고서에는 '한국'의 이름이 74회 등장합니다. 백악관은 특히 "미국 홀로 공급망 취약성을 해결할 수 없다"며 동맹 및 파트너와의 협력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지난 4월 백악관이 개최한 이른바 '반도체 화상회의'에도 초대됐던 삼성전자는 동맹국에 위치한 미국의 든든한 파트너입니다.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웨이퍼 실물을 직접 들어보이며 반도체 수급난 해소를 강조했다. 연합뉴스삼성전자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텍사스주 오스틴에 이어 미국에 두번째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고 부지 선정을 위한 협상을 벌이는 중입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에는 텍사스의 중소도시인 테일러시(市)가 후보지 5곳 가운데 처음으로 재산세 환급 등의 내용이 담긴 지원 결의안을 승인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파운드리 업계 1위 대만의 TSMC도 애리조나주에 360억 달러를 들여 6개의 생산라인을 증설하기로 했습니다. TSMC는 이어 일본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등 자국 '대만'이 지닌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반도체 영토 확장에 나섰습니다. 양사는 나란히 유럽 진출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삼성전자와 TSMC는 유럽 내 공장 건설을 위한 예비 논의를 벌였다"고 전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은 기본적으로 미국 기업과 해외 기업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본사가 아닌 사업장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텔이 지원을 받는다면 삼성전자와 TSMC도 비슷한 수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얼핏 자국 기업인 인텔 챙기기로 비칠 수 있지만 삼성전자에도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