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제공
유신정권 시절 조작된 간첩사건에 의해 '반(反)국가단체'로 몰렸던 재외동포단체 회원들에 대한 여권 발급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 상 거주·이전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판단이 나왔다.
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인권위는 지난달 26일 재일동포들이 모인 사회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회원들이 외교부 등을 상대로 '한통련 소속이란 이유만으로 여권 발급을 안해주거나 유효기간을 제한한다'며 낸 진정에 대해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외교부 장관에게 "여권법 시행령 제6조 2항 5호(국외에 체류하는 국가보안법 제2조에 따른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통일·외교정책에 중대한 침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사람)를 적용함에 있어 실체적 요건에 대한 판단 없이 일률적으로 여권의 유효기간을 제한하지 않도록 관련절차를 정비하라"고 권고했다.
이와 함께 재외국민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는 조치가 자국민의 '입국 불허'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여권법과 관련 시행령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앞서 손형근 의장 등 한통련 회원 5명은 지난 2019년 10월 "여권발급 신청을 하면 정부가 신원진술서를 요구하면서 여권발급과 무관한 질문을 하고 한통련을 탈퇴할 의사가 없는지 등을 물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또한 다른 내국인과 달리 여권발급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했다며 "여권발급에 필요한 정보가 아닐 뿐 아니라 특정단체 소속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와 본인이 어떤 단체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밝히지 않을 자유를 모두 침해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진정인들은 당국이 요구한 신원진술서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경력 △방북(訪北) 경력 △북한선박 승선관계 △여행증명서 발급신청 관련사항(초청자 성명·발급신청 이유·국내 여행일정) 등을 상술할 것을 요구받았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지난 1977년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통일연합(한민통)이 정부가 날조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사건'에서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굴레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재학 중이던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씨는 간첩으로 몰려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이 고문행위 등 강압수사에 따라 조작됐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김씨 등은 2013년 재심을 통해 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가가 찍은 낙인의 뿌리는 깊었다. 한통련 회원들은 한국 국적임에도 30년이 넘게 국내를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했다. 2003년 9월 한시적으로 조건 없는 입국이 보장됐지만, 여권발급은 이들에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여권을 아예 발급받지 못한 손 의장의 경우 '국보법 위반 수배자'로 여권법에 규정된 여권발급 거부 대상자에 해당했다고 해명했다. 또 "여권 유효기간 제한의 대상이 되는 '반국가단체 구성원' 범위에 재적 경력자를 제외하고 '반국가단체 현 종사자'로 한정했다"며 "개인정보보호 등을 위해 신원확인서 기재사항도 대폭 축소해 2019년 9월부터 시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외교당국이 한통련 탈퇴 의사여부를 질문해 '양심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진정인들의 주장은 기각했다. 별도의 대면심사 절차는 없었고, 신원확인서의 서면양식 상 탈퇴의사를 묻는 항목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손 의장의 진정 역시 "여권발급 거부일로부터 1년 이상 지나 진정한 경우"라며 각하했다.
다만 "진정인들이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위해가 되는지 여부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체적인 행위나 사실관계에 의해 그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며 "외교부는 진정인들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란 취지의 답변만을 하고 있을 뿐 어떠한 행위가 국가의 안전보장에 위해가 되는지에 대한 아무런 증명도 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원조회 결과 특이점이 없었던 한통련 회원들조차 대면심사 없이 각각 1년·3년으로 여권 기한을 둔 점을 들어 "외교부가 (유효기간 제한에 대한) 구체적 판단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는 여권법 시행령 상 요건에 대한 심사를 구체적으로 하지 않아 대한민국 입·출국 및 해외여행 등 헌법 제1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는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하여 어떠한 나라를 떠날 권리와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한 세계인권선언과 UN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도 인용했다. 대법 판례를 들어 "헌법 상 거주·이전의 자유는 우리나라를 떠날 수 있는 출국의 자유와 외국 체류를 중단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입국의 자유도 포함된다"고 짚었다.
인권위는 "필요한 경우 귀국의 자유를 제한한다 해도 그 본질적 내용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며 "일본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인 진정인의 여권발급을 거부하는 조치는 국가가 국민의 국내 입국을 불허해 모국으로 돌아올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보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여권발급 거부의 근거가 되는 여권법 제12조는 대한민국에 거주하다 죄를 지은 내국인이 해외로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이미 도주한 자에 대한 재발급 제한을 통해 국내로 귀국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취지"라며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다분히 정치적 활동을 하는 재외국민의 국내 입국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라 볼 여지가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못박았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이러한 처분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으로 이뤄진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대한민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며 "국민의 거주·이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통련의 완전한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이번 사건을 대리한 임종인 변호사는 "외국에 있는 동포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탄압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 전향적 결정이라 생각한다"며 "외교부 등이 인권위 권고에 잘 따라 재외국민들을 차별하거나 인권을 탄압하는 일들을 없애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