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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경비원 '정신질병' 산재 살펴보니…"업무상 인과관계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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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간 '정신질병' 산재 질병판정서 22건 분석
"업무상 인과관계 증명이 중요"
"고용불안 시달리는 경비원, 산재 신청 자체가 미미"

그래픽=고경민 기자

 

경기도 군포의 한 아파트 경비노동자였던 정모(56)씨는 지난해 6월 아파트 입주민으로부터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단지 내 주차관리를 하던 정씨가 주차금지 스티커를 붙이자 차주인 입주민이 "네 주인이 누구냐"는 폭언과 함께 정씨의 어깨를 수차례 가격한 것이다. 입주민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경찰을 부르기도 했는데, 경찰 앞에서도 "(정씨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애 처음 들어본 모욕적 언사는 5분이나 이어졌다. 정씨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후 정씨는 계속 출근했지만,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더 이상 업무를 지속할 수 없었던 정씨는 일을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씨는 지난해 9월 경기도노동권익센터 마을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근로복지공단 안양지사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정씨가 신청한 '외상성 신경증'에 대해서는 요양 승인 결정을, '비기질성 불면증'과 '경도 우울에피소드'에 대해서는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정씨 사건을 지원한 정해명 노무사는 "신경증과 우울증 중 하나만 인정되더라도 치료 기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면서도 "사건의 강도는 센데 치료 기간이 짧았던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청에서 심의까지 통상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 사이에 검사하니 증상이 조금 호전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일단, 이번 사건은 입주민이 정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비원에게 폭언과 물리력을 행사한 사건인 점을 판정위원들이 인정했다"며 "피해 경비원분께서 그 전에 우울증 등의 병력이 없었던 점도 주효했다"고 덧붙였다.

경비원에 대한 각종 갑질은 아직도 비일비재하지만, 정씨 사례처럼 산업재해를 신청해 인정까지 받는 경우는 드물다.

아파트 경비노동자.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CBS노컷뉴스는 11일 정의당 강은미 의원실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지난 4년간 경비노동자 '정신질병' 업무상질병판정서 총 22건을 입수했다. 다만, 분석의 편리성을 위해 근로복지공단 최초 1회차 결재 건 중 △직종에 '경비'를 포함하면서 △업종은 '건물 등의 종합관리사업'에 해당하는 자료로 제한했다.

이 중 경비원이 입주민 등으로부터 폭행이나 폭언을 당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건수는 5건이었다. △2017년 2건 △2018년 1건 △2019년 1건 △2020년 1건 등이다. 인정 여부로 분류하면 △불인정 1건 △부분인정 2건 △인정 2건이었다.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질병이나 장해 등이 '업무'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재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에 따라 업무 중 발생한 불안장애,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 업무와 관련된 각종 정신적 스트레스로 정신 질병이 발생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단 이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이미 가해자의 혐의를 법원에서 인정받은 A씨의 경우 보다 수월하게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A(63)씨는 한 아파트의 관리소장이었다. 그는 2016년 8월 동료근로자가 입주민이 아닌데도 편한 자리인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했다는 이유로 입주민 B씨에게 폭언을 당했다. B씨는 사무실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차고 손으로 내리치면서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 과장 교육을 잘못시켰으니 소장이 책임을 지라"며 약 5시간 동안 소리를 질렀다.

B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 차에 도끼가 실려있다"며 "이번 일이 해결 안 되면 살인사건이 날 것이다. 관리소 이것들 모두 회포를 뜨겠다"며 협박했다.

B씨는 이후 동대표에 당선됐다. B씨는 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A씨를 괴롭혔다. 회의실 의자를 발로 차는 것은 물론, "관리소장을 괴롭히려고 선출됐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진 A씨는 B씨와 다투던 중 기절하는 상황까지 갔다.

A씨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 뒤 각종 법적 절차를 밟았다. 이후 가해자인 B씨는 2018년 2월 업무방해와 협박죄로 벌금 70만 원의 형사처벌을 받았다. 민사재판도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B씨에게 17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공단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해 6월 A씨가 신청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혼합형 불안 및 우울장애'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위원회는 "A씨는 소속사업장 주민의 폭언 및 욕설 협박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혐의가 인정돼 해당 주민이 형사처분과 민사소송 손해배상 처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하면 신청 상병이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게 참석 위원들의 공통 의견"이라고 밝혔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자택에서 경비소장으로 근무한 C씨의 경우 '부분인정'을 받았다. '자살사고를 수반한 우울 에피소드'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됐지만, '빈번한 공황 에피소드'와 '잠들기 힘들거나 조기 각성'의 경우는 인정되지 못했다.

C씨는 2011년 11월부터 조 회장의 자택에서 근무했는데, 조 회장의 아내 이명희씨의 무리한 업무 지시, 폭언, 폭행에 시달렸다. C씨는 이씨로부터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총 27회에 달하는 폭행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장작을 잘못 가져왔다고 장작을 던지거나 고무신이 더럽다고 고무신을 던지는 형태였다. "개XX", "나가 죽어라" 같은 폭언도 비일비재했다.

위원회는 지난 2019년 5월 C씨의 우울 에피소드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위원회는 "약 6년 7개월간 위 사업장에서 경비 업무를 수행하면서 거주인으로부터 무리한 업무 지시, 폭언, 폭행 등을 당한 사실이 확인된다"며 "관련 사안으로 여러 차례 관할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어 스트레스가 증가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신청 상병 간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아예 불인정이 된 사례도 있었다. D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주요우울병'에 대해 업무상 재해 신청을 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D씨의 과실이 일부 있었던 점, 사실관계가 일부 엇갈리는 점이 참작된 것으로 보인다.

D씨의 주장은 이렇다. D씨는 관리소장으로 10여 년간 재직했지만, 부당해고를 당했다. 특히 해고 직전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으며 해고를 당한 후에도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D씨는 복직명령을 받은 뒤 출근했지만, 자신을 해고하기 위한 서류작업을 지시받는 등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D씨의 주장에 대한 사업장의 의견은 달랐다. 사업장은 D씨가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유는 해고 관련 서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비위 관련 서류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위원회는 사건 내용과 진료기록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D씨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소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재활용품 판매 계약 문제 △입주자 대표회의 회의록 관리문제 △장기수선충당금 예치 은행 무단 변경 문제 △아파트 관련 공사 수의계약 문제 등은 D씨의 징계사유로 정당하다는 경기노동위원회의 판정서를 참고했다.

위원회는 "2회의 해고가 있었고 해고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위법행위와 관련된 징계해고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해당 상병을 유발할 정도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해명 노무사는 "사실관계를 다투거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산업재해 인정이 어려운 때도 있다"며 "그래서 CCTV나 주변인 진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업무적 요소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인정이 중요하다"며 "경비노동자가 주장하거나 경험하는 사건의 강도 즉 갑질 에피소드의 강도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정신질환 등으로 인한 산업재해 인정을 받으려면, 의사 소견서가 아니라 심리검사가 필요하다. 관련 전문가가 하는데 검사결과를 보고 판단한다"며 "공단의 정신질병 업무 관련성 조사 지침을 참고하면 어떻게 판정을 내리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폭력이 일상화된 경비업 현실에 비해 산업재해 신청이 적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안양군포의왕과천 비정규직센터 신영배 자문위원은 "경비원들이 3개월 초단기 계약이 많고, 근무 내내 해고에 대한 공포가 많다 보니 어지간한 갑질은 참고 사는 경우가 많다"며 "일상적 갑질이 비일비재하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많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신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된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며 "경비원을 하려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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