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로 보는 한국사 ②]빠루 들던 나경원, 왜 중도를 향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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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힘입어 정치 입문.."성공의 표상"
'BBK 주어없음' 사건으로 논란 시작
친박계 지원으로 2018년 원내대표 당선
빠루, 文 수석대변인 발언..강경 보수 노선
"중도 잡아야" 10년만에 서울시장 재도전
■ 방송 : CBS 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FM 98.1 (18:25~20:00)
■ 진행 : 김종대 (연세대 객원교수)
■ 대담 :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 김수민 평론가, 김민하 평론가, 임경빈 작가



◇ 김종대> 김종대의 뉴스업 이번 순서는 '후보로 본 한국 현대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나경원 예비후보로 보는 현대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대표, 김수민 시사 평론가, 김민하 시사 평론가. 세 분 자리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김수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민하> 안녕하세요.

◇ 김종대> 나경원 예비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임경빈 작가가 나경원 후보에 대해 정리했다고 합니다. 들어보고 가겠습니다.

◆ 임경빈> "모두의 이력서는 역사가 된다." 정치인 나경원의 정치 약사(略史)입니다. 1963년생, 1992년 사법시험 합격. 나경원 정치사의 전반부는 날짜보다도 누구와 함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신문에 처음으로 나경원 이름 석 자가 등장한 건 1995년 2월 17일 사법연수원 24기 수료를 알리는 기사에서 역대 가장 많은 11명의 여성 판사 임용자 중 한 명으로 소개됐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사법고시 수석합격자였던 동기 원희룡 제주지사가 더 주목을 받았었는데요.

정치의 시작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함께였습니다. 2002년 9월에 사표를 내고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회창 캠프에 상근특보로 데뷔를 했습니다. 이회창 후보의 선거 유세 때마다 함께하면서 세련되고 젊은 이미지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이회창 후보는 잠시 정계를 은퇴하고요. 나경원 특보는 잠시 변호사를 개업합니다. 2004년에는 몇 안 남은 이회창계 인사로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다음 함께한 인물은 이명박 전 대통령입니다. 2007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변인을 맡으면서 최대 쟁점이었던 BBK 실소유주 논란 때는 일명 주어 없음 발언으로 '필사의 쉴드' 라는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이명박 후보가 한 대학 강연에서 직접 BBK를 설립했다는 발언을 한 영상이 공개가 됐는데 이에 대해서 '내가' 라는 주어가 없다면서 본인이 설립했다는 말은 아니라고 방어를 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발언 직접 들어보시죠.

[이명박 /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강연 : 금년 1월달에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나경원 /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 대변인 : 'BBK를 내가 설립하였다' 라는 표현만 있을 뿐인데 '내가 설립하였다' 라고 광고하는 것은 역시 그 뜻을 왜곡하는 허위광고입니다.]

◆ 임경빈> 이때 활약 덕분에 2008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2010년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를 했습니다. 2011년은 많은 정치인들에게 분기점이 됐지만 나경원 예비후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세훈 시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열린 재보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박원순 후보에 패배를 했습니다. 패배 자체도 문제지만 선거 과정에서 각종 논란이 불거지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상당히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해 손해가 막심했다는 평가입니다.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불출마를 선언할 정도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죠.

◇ 김종대> 임경빈 작가가 나경원 예비후보의 이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아무래도 나경원 후보 정치적 이력을 보면 원내대표 전과 후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지금 퀵마우스가 원내대표에 도전하기 이전까지 정리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계 입문 당시부터 함께했던 인물들 보면 전부 대선후보예요. 아주 정치계의 금수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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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시사평론가.


◆ 김수민> 일단 대선 입문할 때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이회창 당시 총재의 전격적인 발탁이었다라고 하는 대목이고 사실 그때 발탁된 것이 나경원 의원뿐만이 아닙니다. 이혜훈 전 의원 그리고 조윤선 전 장관 이렇게 3명의 여성 트리오다라는 평가가 있었죠. 나경원 여성특보, 이혜훈 정책특보, 조윤선 선대위 대변인 이렇게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캠프가 꾸려졌던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이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물론 한 분은 부침을 많이 겪으셨죠. 현재는 정치권에 없는 분이 됐지만 한동안의 세월들을 이때 발탁된 사람들이 풍미했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 김민하> 요즘에는 이런 말 하면 안되는데, 그 당시 보도된 걸 보면 '이회창 총재는 미녀 대변인을 좋아한다' 이런 식의 표현도 나오고. 이렇게 여성 인사들을 영입해서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 김종대> 아무래도 본인 이미지의 보완 역할 또 균형 맞추기 아닐까요? 어떻게 보셨습니까, 박 대표님?

◆ 박성민> 그때 그 세 분이 다 전문직으로서 상당히 주목을 받았는데 이회창이 대통령이 됐으면 아마 그분들의 인생도 달라졌을 거라고 보는데 패배를 했기 때문에 다 이제 본업으로 돌아갔죠. 그래서 제가 알고 있기로는 나경원, 조윤선 두 분은 법조인이니까 그때 아마 로펌 같은 데로 갔을 것 같고요. 이혜훈 의원은 그 뒤에 어쨌든 그분 경제학자인데 그러다가 2004년도에 총선 있어서 두 분은 그러니까 조윤선 대변인은 말고 이혜훈, 나경원 두 분은 그때 들어왔죠.

◇ 김종대> 7년간 판사 시절을 거쳐 정치에 발을 담근 건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여성특별보좌관. 그런데 2007년 이명박 후보 대변인 시절에 나경원 후보의 일대 유행어가 등장합니다. 그 유명한 '주어가 없다'는 발언. 문장의 주어가 없다. 임경빈 작가가 좀 전에 정리해 주기도 했는데요. 이 당시 논란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볼까요?

◆ 김수민> 당시 BBK 논란이 굉장히 뜨겁게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선 직전에 한 동영상이 공개가 됐습니다. 광운대학교에서 강연을 예전에 했던 동영상인데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이런 대목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본인이 설립했다고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당시에 한나라당이라든지 또 나경원 현 후보를 포함한 선대위라든지 이쪽에서 한 얘기는 이게 설립하였다라고만 돼 있지 주어, 내가라고 하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거는 그냥 자기가 설립했다는 뜻이 아니라 BBK라는 회사가 설립이 됐는데 같이 하기로 했다, 이런 뜻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면서 나경원 대변인이 당시에 주어가 없다라고 얘기한 것이죠.

◇ 김종대> 아니, 원래 한국어가 주어가 좀 불확실해요. 그냥 설립했다 이러니까 주어가 없다는 걸 부각시켰어요. 그런데 그 후에 박형준 후보도 이명박 후보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면서 이 논리를 그대로 재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명박 후보의 BBK 설립 의혹이 영상이 나온 동영상이 조작됐다, 이런 주장까지 했다죠.

◆ 김민하> 그렇죠. 영상이라는 게 지금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이나 이런 걸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영상 조작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딥페이크 기술도 있고요. 이때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박형준 전 의원이 그때 이렇게 얘기했거든요. 이게 보통 사람들이 보면 동영상이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기술자들이 BBK, LK뱅크,EBK 이렇게 좀 뭐랄까요, 평소에 흔히 듣기 어려운 발언을 한 것을 조작하는 것은 전문가들은 쉽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목소리가 발음이 조작됐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걸 철저히 조사해 봐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기도 했고.

그리고 심지어 이제 BBK 동영상을 공개를 했던 당시에 대통합민주신당 등에 대해서 모종의 돈 거래 가능성 이런 것까지 제기를 하면서 정치공작을 얘기하기도 했고 지금 보면 상당히 좀 무리수로 보일 수 있는 논리지만 이때는 아무래도 대선 때니까 다들 사생결단하는 분위기 아니었겠습니까? 상당히 좀 절박한 심정으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 김수민> 제 기억으로는 이 BBK 주어 사건이 나경원 후보에게 굉장히 중대한 변곡점이 됩니다. 첫 번째 변곡점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제가 이 당시에 대학생이었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생들 사이에서 나경원 의원을 굉장히 성공의 표상 이렇게 인식되어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그 사람의 당적이나 성향 이런 것보다는 저 사람 굉장히 지적이고 굉장히 성공했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논란보다는 성공의 한 상징 이렇게 많이들 비쳐줬었거든요.

게다가 당시에 노무현 정부 중반, 후반은 인기가 좀 떨어지고 또 한나라당이 반사이득을 입으면서 오히려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들도 젊은층에서도 많이 공유를 하고 있던 그런 시점이라서 한나라당이 당시에 젊은층 인기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나경원 의원은 한때는 청년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다라는 건데 BBK 주어 사건 이후로 이제 이 역시도 정치인으로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이 되었다라고 볼 수 있겠죠.



◇ 김종대> 거기서 청년층한테는 이미지가 약간 훼손이 있었다, 이런 말씀이신데요. 박 대표님, 나경원 후보의 정계 입문 당시 이미지 어떻게 보셨습니까?

◆ 박성민> 우리가 지난주에 오세훈 전 시장에 대해서 얘기할 때 연예인 같은 이런 표현을 썼어요. 나경원 전 의원은 연예인보다도 더 연예인 같은 정치인, 그런 이미지로 기억되고요. 실제로 2002년 대통령 선거에 한나라당이 지고 나서 이회창 후보가 지고 나서 야당을 하잖아요. 2004년 총선 때 그때 한나라당이 대변인 인사를 보면 여성 대변인이 처음에는 굉장히 강경한 전여옥 의원이 대변인을 합니다. 남성 대변인도 있지만 여성 대변인이 전여옥 의원이 했고 그다음 배턴을 이어받은 게 나경원 의원이에요. 그다음 정권을 찾아온 뒤에는 조윤선 대변인. 상대적으로 가면서 강성에서 조금 유하게 갔죠.

그런 정도로 지금 이걸 개별 사안을 놓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당시에 전여옥, 나경원, 조윤선으로 이어지는 대변인들은 비교적 한나라당이 정권을 찾아오는 데 상당한 대중적인 또 논리적인 기여를 한. 그러니까 제 기억은 이거 주어가 없다고 그랬지만 전여옥 의원도 나경원 의원도 조윤선 의원도 대변인으로서 논평을 굉장히 잘했던 걸로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 김종대> 그렇군요.

◆ 김민하> 특히 주어가 없다 이런 정도까지 간 거는 이 당시에 사실은 이 전 단계에서도 친이, 친박계의 경선 구도부터 시작을 해서 사실은 당이 이렇게 그 전에도 물론 나름 주류, 비주류가 있고 지역별로 계파가 있기는 했습니다마는 친이계, 친박계 이렇게 쫙 갈라지는 상황 속에서 한쪽의 확실하게 편을 서는 그런 상황으로 쭉 당내 논리들이 굴러간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어떤 영향 속에서 좀 더 이렇게 과장된 어떤 그런 발언들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또 희화화되고 이런 상황들이 계속 이어졌던 것 같아요.

◇ 김종대> 그만큼 이미지가 부각됐었기 때문에 공격도 더 많이 받은 것 같은데요.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승승장구했어요. 2010년에 최고위원까지 올랐고요. 그때 이미 차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될 정도였다고요?

◆ 박성민> 그런데 일단 2004년에 비례대표로 들어왔잖아요. 그때는 비례대표를 한 번 하면 지역구에 반드시 나가 있게 돼 있습니다. 비례대표 연속으로는 잘 안 해 줬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은 송파를 원했어요, 송파 병을 구체적으로. 결국은 중구로 갔습니다. 중구가 더 중심지기는 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원했던 게 아니고 밀린 겁니다. 그 이유를 보면 2006년도에 서울시장 후보를 그만둔 이명박 후보는 이재오를 당대표로 밀었고 박근혜 당대표는 강재섭을 당대표로 밀어서 굉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대표가 다음 대통령 선거를 관리하는 당대표기 때문에.

그래서 그건 잘 아시다시피 강재섭 대표가 됐죠. 이재오 대표가 2등이 됐고. 2008년 총선 당시에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됐잖아요. 친이계가 됐고 친이계에서는 이재오가 실세 중의 실세일 때 아닙니까, 공천할 당시에는. 그러니까 공천심사위원회도 구성 자체가 친이명박 때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친이재오계가 많았고 그분들이 봤을 때 이 강재섭계, 나경원 의원은 굉장히 강재섭 의원이랑 가까웠기 때문에 공천 그래서 밀렸고. 이건 나중에 가서도 뒤에도 또 얘기가 나오겠습니다마는 그렇게 되고.

2010년에 서울시장을 이분이 이번에 두 번째 도전입니다. 2010년에 오세훈 시장한테 도전했었는데 예선전에서 원희룡하고 이겼지만 본경선에서는 졌고요. 그리고 2011년에는 놀라운 것이 얼마나 대중적 스타였냐 하면 정치권에서는 사실 여성들이 단독으로 최고위원으로 가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성 할당제라는 게 있어요. 5등 밖에 있더라도 여성 1명은 넣어주는 거죠. 그런데 전여옥 의원이 2008년도인가에 자력으로 4등인가를 했어요. 자력으로 4등 한 게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더 놀라운 거는 2011년에 나경원 의원이 최고위원을 3등을 하는데.

2011년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


◇ 김종대> 3등.

◆ 박성민> 자력 3등입니다, 이건. 자력 3등인데 여론조사는 제 기억으로는 1등 했어요. 그래서 홍준표 대표가 대표가 됐지만 여론조사에서는 나경원. 그만큼 대중적인 인기라고 하는 건 그때부터 이미 대선주자 반열이에요. 대선주자 반열이라고 우리가 얘기할 때는 인지도가 90% 이상을 넘고. 그런데 모든 전당대회에 나오면 압도적인 인기가 있는 거죠.

◇ 김종대> 홍준표 대표가 될 때 그때 이제 3등으로, 2등은 유승민이고 3등은 나경원, 4등 원희룡, 5등 남경필, 그렇게 됐죠.

◆ 김수민> 제가 봤을 때는 2008년 총선 때 송파에서 밀려서 중구로 가게 됐잖아요. 이게 플러스가 됐을 것 같아요, 오히려. 어차피 그때는 사실 어디 지역인가 이걸 떠나서 한나라당이 강세인 상황이기는 했는데 송파는 원래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었잖아요. 중구로 가면 그 당시에 민주당의 정범구 의원이 있었고 또 자유선진당의 신은경 후보도 나왔고 치열한 3파전을 나름대로 거쳤단 말입니다.

◇ 김종대> 그렇죠. 거기 언론 많이 갔어요.

◆ 김수민> 그 상황에서 승리를 거뒀고 그리고 2011년 최고위원 선거 때까지도 나경원 전 의원은 단순한 한나라당 정치인이라는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는 대중적인 정치인이었었다라고 볼 수 있겠죠.

◇ 김종대> 2011년에 결정적인 변수가 발생하죠. 오세훈 전 시장의 전격 사퇴로 한나라당이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 초래됩니다. 결국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경원 후보가 나서게 됩니다. 10년 전일이네요, 벌써. 그러니까 굉장히 이 정도면 체급이 이미 중량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상태라고 봐야 되겠죠?

◆ 박성민> 그렇죠.

◆ 김민하> 굉장히 대중적인 차원에서 굉장히 인지도도 있고 굉장히 유명하고 그리고 누구든지 나경원 하면 정치인들 이름 잘 모르는데 아, 그 사람 했는데 사실 또 어떤 측면에서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게 보통 인지도나 인기만 갖고 평가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치인으로서 자기 중심, 자기 주장, 자기 논리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느냐를 평가하는 것도 필요한데 사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경원 후보가 당시에 좀 약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세훈 전 시장이 사퇴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에 자신의 직을 주민투표에 걸고 그런 과정에서도 나경원 후보의 경우에는 그거에 대해서 당이 힘을 실어줘야 된다, 이런 주장도 해서 여러 논란에 휘말리기도 하고 굉장히 중심이 좀 흔들리는 듯한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줬었거든요.

그래서 사실 그때도 이미지만 너무 강한 정치인 아니냐 이런 평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사실은 본인이 서울시장에 출마를 하는 데 있어서의 어느 정도의 족쇄랄까, 이런 꼬리표가 됐을 텐데 서울시장에 출마를 해서 싸우면서 아마 그런 것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 중의 하나로 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 박성민> 그런데 당시로 돌아가보면 사실 2011년 7월 4일날 전당대회에서 나경원 최고위원이 3등으로 되거든요. 그 당시에 당의 분위기는 무상급식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어요. 나중에 오세훈 시장이 직을 걸고 이거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있지만 그래서 재정 위기, 선별복지, 보편복지 이런 얘기할 때기 때문에 유승민 최고가 무상급식 문제에 대해서 오세훈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남경필 최고나 이런 분들은 비판적이었는데 나경원 의원은 그런 면에서 그때 당의 전체적인 주류 분위기를 타고 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 김종대> 알겠습니다. 서울시장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이 서울시장 출마는 얼마나 정치적 자산이 됐는가 한번 정리해 보죠. 서울시장 선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김수민> 이때 사실 네거티브 캠페인에 본격적으로 나경원 후보가 노출된 첫 번째 선거가 됐던 것 같은데요. 이때 처음에 이제 나는 꼼수다 팟캐스트에서 제기했던 1억 피부과 시술 의혹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1억 원의 연회비를 내고 그런 치료를 받았다, 시술을 받았다 이런 의혹이었는데 나경원 후보 측에서는 딸의 피부과 치료를 위해서 방문했던 거고 이렇게 연회비도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 결과도 조금 나경원 후보 주장에 조금 더 가까운 그런 결과가 나오기는 했는데 그런데 사실 이 하나의 사안이 크게 작용했다기보다는 연달아 터졌던 몇 가지 의혹이라든지 비판이 있었거든요.

하나가 이제 본인 집안에서 경영을 하고 있는 재단, 사학재단의 비리 의혹인데 과거 16대 국회 당시에 국정감사를 앞두고 자료를 행정실장이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이 다시 도마 위에 올라왔고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장애아 목욕을 하는 것이 그대로 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것이 보니까 사진사도 있었고 조명까지 설치가 되었기 때문에 인권침해다 이런 비판을 많이 받았죠. 이런 부분들이 좀 선거에서는 타격을 받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컨설팅 '민' 박성민 대표.


◆ 박성민> 그런데 2011년의 배경을 좀 보시면 2011년 4월달에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나라당이 참패를 당해요. 이제 강재섭 후보가 분당에서 손학규 후보한테 집니다. 분당이라는 데는 지면 안 되는 데거든요. 그런데 거기 집니다. 강원도에 나간 것도 지고. 그거는 그때 한나라당 내에 이미 균열이 좀 있었습니다. 박근혜라고 하는 차기 권력과 현 권력에 균열이 좀 있고 그래서 4월 보궐선거도 그렇고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그렇고 총력적으로 당이 대응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것이 실제로 사보타지까지는 아니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 뒤에도 나옵니다마는 4월 강재섭이 분당에서 질 때 손학규 후보가 캠페인을 잘한 것도 있지만 저는 아까도 말했지만 박근혜와 강재섭의 악연은 박근혜가 2006년도에 밀었는데 배신당했다 이게 굉장히 강했거든요.

강재섭이나 나경원이나 이분들에 대한 선거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죠. 이거는 그다음에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공천을 할 때 친이계를 공천 학살한 게 아니고 이를테면 친강재섭계를 거의 다 공천 탈락시켰거든요. 그런 점도 있기 때문에 이런 개인적인 어떤 네거티브도 있지만 이미 당이 총력적으로 박원순이나 이렇게 여기에 맞서 싸울 정도로 결집력이 이미 좀 이완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 김민하> 그러니까 이걸 잠깐 부연하자면 이게 강재섭 대표 체제가 그전에 이제 말씀하셨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밀어서 강재섭 주류 체제가 됐었던 건데 그다음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이 된 이후에 공천 학살을 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을 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것에 어떤 주도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강재섭 대표가 지목이 됐던 거고 그러면서 강재섭은 배신자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고 그 이후에 이제 여러 가지 흐름에 사실은 나경원 후보도 끌려갔던 거죠.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강재섭계로 분류가 됐으니까. 그런 흐름인 건데 사실 그래서 강재섭계라고 불리는 이분들이 상당히 입장이 이상해지는 과정이 있었죠. 그런데 선거가 예를 들면 방금 말씀하신 이제 1억 피부과 시술 의혹이라든지 쭉 이렇게 의혹이 제기된 것들도 사실 나경원 지금 후보 입장에서 보면 그전까지는 어쨌든 엘리트 출신이고 그다음에 이미지 좋고 능력 있고 이런 좀 좋은 이미지로 어쨌든 쭉 이어왔다면 그 이미지가 여기서는 안 좋은 기득권 이미지, 부패의 기득권 이미지, 뭔가 이제 있는 사람 이미지, 이런 게 돼버리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사실은 당내로도 그렇고 대외적으로도 그렇고 상당히 이 선거 때문에 좀 1차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 김종대> 이 서울시장에서 아주 가혹하고 냉혹한 검증도 받았고요. 이 선거에 패배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적 빙하기로 간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19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도 못 했다가 3년 후에 열린 동작구 보궐선거. 여기서 다시 부활이 시작되네요. 그때 상황 설명해 주세요.

◆ 김수민> 그때 동작은 원래 정몽준 당시 의원이 지역구였었는데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위해서 사퇴를 했었죠. 그리고 나서 서울시장 출마를 했는데 정몽준 당시 의원은 낙선을 했고 그러면 그 빈자리를 서울시장 선거 끝나자마자 그때 아마 7.30선거였을 겁니다. 그 선거가 열리게 되는데 거기에 나경원 의원이 재기의 발판으로서 재보궐선거에 들어가게 되고 당시 야권에서는 민주당에서는 기동민 당시는 의원이 아니었죠. 현 의원인데 서울시 부시장 출신인 기동민 후보가 나갔고 정의당에서 노회찬 후보가 출마를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가 되기는 했는데 그런데 단일화가 좀 늦다 보니까 민주당 전통적 지지층이라는 이쪽에서 노회찬 후보에게 표가 결집되는 부분이 낮았죠. 그러면서 결국에는 나경원 후보가 신승을 하게 되는.

◇ 김종대> 그때 기동민 후보가 조금만 더 일찍 사퇴했으면 투표용지에 이름이 빠지고 그러면 그 무효표가 다시 만약 노회찬 후보 쪽으로 갔다면 선거 결과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 김수민> 그렇습니다.

◇ 김종대> 나경원 후보가 이때 출마했을 때 슬로건이 주효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당시 슬로건 잠깐 들어보고 오겠습니다.

[ 나경원 / 2014년 재·보궐선거 당시 새누리당 서울 동작을 후보 : 우리 동작, 강남의 원조였던 동작을 이제 강남 3구가 아닌 강남 4구의 동작으로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테헤란로를 뚫어서 강남의 상권을 사당로까지 이어봅시다, 여러분.]

◇ 김종대> 동작이 원래 강남의 중심이다. 강남 4구 슬로건. 총선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되겠죠?

◆ 박성민> 아니, 이게 원래 강남은 강남, 서초만을 말한 거예요. 강남, 서초 2개구만. 그런데 그때 김영순 송파구청장이 처음으로 강남 3구라는 말을 쓰면서 송파를 갖다 강남 3구로 편입을 시키는데 이거 이제 대체로 아파트 가격이라든가 등등등 해서 대중적 승인을 받아요. 이제 강남 3구는 이때쯤이면 다 승인된 거고 강동구와 동작구가 강남 4구를 서로 외칠 때입니다. 강동구 우리가 강남 4구다, 동작이 아니, 우리가 강남 4구다 이렇게 외칠 때기 때문에.

◆ 김수민> 마치 트럼프 대통령 슬로건 같아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였잖아요. 동작을 다시 위대하게, 약간 이런 느낌이 납니다.

◆ 김민하> 워낙 선거라는 게 그렇기도 하고 그런 측면도 있고. 그리고 사실 나경원 의원이 물론 나경원 후보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맨파워가 있지만, 맨파워가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 말씀드렸던 과정 때문에 상당히 자기의 이미지나 이런 것들이 상실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거전략으로서 이익 배분에 기대는 슬로건. 그래서 그게 바로 강남 4구로서 집값이 오른다, 이제부터 개발이 된다, 기다려온 개발이 이제 자신의 당선으로부터 열린다 여기에 힘을 실었던 것 같고 그게 그래서 이제 좀 효력, 효과가 발휘된 거 아니냐 이런 생각도 드는 거죠.

지난 2016년 20대 총선에서 승리해 기뻐하는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당선인의 모습


◇ 김종대> 어쨌든 어려운 선거를 이겼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재기에 완전히 성공한 나경원 후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되는데요. 이후부터의 나경원 후보의 발자취 다시 퀵마우스 임경빈 작가가 정리했습니다.

◆ 임경빈> 2014년 재보궐선거로 여의도에 복귀한 이후에는 주류를 지향하는 비주류의 대표 선수격으로 연속해서 원내대표에 도전합니다. 2016년 5월에는 소프트 친박 정진석 의원에게, 박근혜 탄핵 이후인 12월에는 강성 친박 정우택 의원에게 밀려서 연속 고배를 마셨고요. 하지만 다른 비박계들이 탈당해서 바른미래당을 창당할 때 당을 지킨 뒤 2018년 마침내 친박계의 지원을 받아서 드디어 3수 끝에 원내대표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원내대표 나경원은 기존 이미지와 굉장히 다른 거친 단어들과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한 장외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문빠, 달창 같은 어휘를 사용했다가 사과하기도 했고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쇠지렛대 일명 빠루 사진이죠.

2019년 국회 패스트트랙 사태 당시 강경투쟁을 주도하면서 국회에서 중세 공성전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과 물리적 충돌, 동료 의원 감금 사태 등 동물국회가 연출이 됐는데 국회 방호과 직원들이 사용하려던 쇠지렛대를 들어 보이는 나경원 의원의 모습은 이 사건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2020년 총선 패배로까지 이어지는 한축이 됐다는 평가입니다. 나경원 본인도 2020년 21대 총선에서 정치신인 이수진 의원에게 패배해서 5선이 좌절됐습니다. 그리고 2021년 10년 전에 한번 실패했던 서울시장에 다시 도전하는 상황. 정통 보수 이회창, 실용 보수 이명박의 입으로 정계에 등장했다가 20년 만에 강성 보수의 간판이 되어버린 나경원. 이번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지난 2019년 4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안과 앞에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어제 민주당 신원미상의 인물들이 의안과 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한 노루발못뽑이(일명 빠루)'를 들어보이고 있다. 의총 사회를 본 김정재 의원은 "(원내)대표가 들고나온 이 빠루는 어제 7층 의안과의 문을 부수기 위해 민주당인지 경호과인지 정확지는 않지만 (그들로부터)저희가 뺏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김종대> 친박계 지원까지도 얻어서 원내대표 직책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 당시에 정치 지형 꽤나 복잡했죠.

◆ 박성민> 그러니까 이게 주목해 봐야 될 게 2016년 12월달 두 번째 원내대표 경선인데요. 2016년 총선 끝나고 5월 경선에도 나갔는데 정진석 의원에게 패배합니다. 그리고 2016년 12월달에 다시 원내대표 선거가 있었는데 잘 아시지만 그때는 이미 탄핵 국면 아닙니까, 촛불 정국이고. 이때 나경원 의원이 이른바 이제 탄핵파의 대표로 나간 겁니다. 그리고 상대는 이른바 탄핵을 반대하는 친박의 정우택 이렇게 붙었죠. 굉장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패배를 했는데 중요한 건 패배를 하고 그 해에 이 당에 희망이 없겠다라고 한 사람들이 다 탈당을 해요. 유승민, 김무성 다 탈당하는데 나경원 의원이 탈당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때 이걸 가지고도 말들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대표로 나갔다가 떨어졌으니까. 그거에 대한 뒷얘기들도 많지만 결국 나중에 2018년에 다시 원내대표 경선할 때는 구도가 어떻게 됐냐 하면 나경원 의원과 김학용 의원이 붙는데 김학용 의원은 탄핵을 찬성하고 탈당했다가 복당한 복당파의 대표입니다.

◇ 김종대> 기억납니다.

◆ 박성민> 친박들이 나경원 의원을 지원하는 그러니까 그만큼 복당파에 대한 당내 여론은 싸늘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친박의 지원을 얻고 승리를 했죠.

◆ 김민하> 그런데 이게 그 당시에도 항상 나오는 얘기가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평가가 이랬어요. 예를 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탄핵파의 대표 그다음에 또는 친박계의 지원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때 언론 보도들은 계파색이 엷은 후보로 승리를 한번 도모해 본다, 뒤쪽에서 계파들이. 이런 평가였거든요. 계파색이 엷다는 건 그 이전에 거쳐온 계파의 부침 이런 상황들도 있지만 본인의 정치적 중심이 좀 얕아 보였다, 항상. 그래서 뭔가 어떤 정치의 좀 옵션처럼 보였지 어떤 정치의 중심을 갖고 가는 정치인은 아니었다라는 인식이 한편에 있었던 것이고 그걸 이미지로 메웠는데 이미지의 강점이 좀 사라진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원내대표직에 도전했는데 성과가 없었던 것이고 그게 이제 뒤로 오면서는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상황이 되면서 강성 이미지로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 사실 이거를 나경원 개인에 맞추면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인 것이고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메꾸고 자신의 새로운 정치를 발굴했다면 발굴한 것인데 여기서 어쨌든 변신이 이루어졌다 이렇게도 볼 수 있겠죠.

◇ 김종대> 세 번 도전 끝에 원내대표에 안착한 이제는 지도급의 정치인으로 크게 부각이 되죠. 그러나 원내대표 하면서 발언들이 거침이 없었습니다. 논란이 되었던 대표적 발언 들어보고 갈까요?

지난 2019년 3월 12일 당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던 중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대변인이라는 식의 발언을 하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뒷줄 가운데)가 단상으로 나가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 나경원 / 2019년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옹호와 대변 이제는 부끄럽습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 주십시오. ]

◇ 김종대> 저 당시 이 장면 기억납니다. 원내대표 연설이 끝나고 마치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전쟁 한번 치른 것 같은 그런 정도였어요. 당시 국회는 또 파행이었고요. 이때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구상이 비판을 많이 받았던 시기 아니었겠습니까?

◆ 김수민> 2019년 3월 12일 시점이니까 하노이 노딜이 3월 초에 있었던 직후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명확한 워딩은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다는 아니었고 수석대변인이라는 그런 보도가 있는데 그런 말을 안 듣게 해 달라, 이거였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이 워딩 자체가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바로 이제 의석 안에서도 고성이 터져나오고 그리고...

◇ 김종대> 고성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아수라장이었어요.

◆ 김수민> 그때 제가 인상적이었던 건 나경원 원내대표가 끝나고 나서 밖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이제 당원들이라든지 의원들이 박수를 치니까 파이팅 하는 그런.

◇ 김종대> 양손을 다 들면서.

◆ 김수민>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약간 조금 힘들어 보였어요. 아까도 사실 연설을 들어보면 조금 말을 더듬는다거나 이런 부분들이 나오는데 본인이 생각해도 이거 크게 논란이 되겠다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김종대> 당시 나경원 원내대표 강경 발언은 계속됐습니다. 원내대표로 확실한 보수 여전사 이미지, 이로써 부각되기 시작했어요. 당시에 이 발언도 한동안 화제였는데 들어보고 가겠습니다.

[ 나경원 / 2019년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거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반민특위 활동이 잘됐어야 됩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국론 분열로 가져온 부분이 있고. ]

◇ 김종대> 갑자기 또 역사를 소환했습니다. 반민특위, 반문특위 이 어떤 실수와 이어지는 해명 계속 논란이 많았죠.

◆ 김민하> 그러니까 요즘에 보수 정치의 트렌드라고 할까요. 문자를 살짝 바꿔서 그걸 가지고 이제 언어유희처럼 해서 지금의 정권을 비판한다거나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는데 이때도 사실 나경원 후보가 그런 시도를 많이 했던 거죠. 그리고 이게 마찬가지로 반민특위, 반문특위 이것도 그랬던 것이고 앞서 퀵마우스님의 소개에서 나오는 문빠 이런 단어들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모로 활용을 했는데 그게 예를 들면 합리적인 정치, 중도적인 정치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사실 그러한 시도가 크게 필요가 없죠. 오히려 촌철살인의 어떤 비유라든지 그런 거를 통해서 많이 얘기를 하는 건데 이미 이렇게 말장난이나 언어유희에 가까운 이런 거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이제부터는 강경 노선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여러 가지 이미지로 해석이 됐던 그런 사항이었습니다.

◇ 김종대> 강경 노선이 서서히 굳어지다가 거의 고착됐다고 보여지는 국면이 2019년 공수처법과 선거법 패스트트랙 저지. 거의 뭐 국회가 동물국회가 지금도 재판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때 모습이 아주 여러분들 뇌리에 생생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 박성민> 2016년 총선을 새누리당이 졌지 않습니까? 1당을 빼앗겼고 2017년 탄핵 이후에 있었던 총선에서도 참패를 당했고. 그다음에 2018년 지방선거도 졌고. 그래서 3번 연속 진 보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감정적으로도 좀 격앙돼 있고 분열돼 있는 걸 이걸 다시 한 번 결집시켜야 되겠다, 이런 게 지배하던 시간이 2019년입니다. 황교안 대표 체제도 들어섰고 대체적으로 이 분위기가 자체가 보수가 우리도 가운데서 뭉칠 수 있다. 이런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다만 이제 제가 봤을 때는 왜 2017년 대선부터 중도, 보수가 떠나갔는가. 그거에 대한 입장을 좀 성찰을 하고 그랬어야 됐는데 분위기상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굉장히 강대강으로 충돌하고 있고 특히 트럼프와 관련해서 북미회담, 남북회담 이러면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것도 굉장히 동맹도 흔들린다 이런 것 때문에 전반적으로 보수진영 전체가 외교 문제나 안보 문제에서도 좀 길을 잃고 방향타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거냐 그런게 흔들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미국은 한미동맹은 우리 우방이고 그런데 보수인 공화당의 트럼프가 아무래도 그러니까 아마 전략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민하 시사평론가.


◆ 김민하> 여기서 그러면 궁금한 게 그때는 2017년 대선 이후에 상당 기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쯤이면 그 조건을 극복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뭔가 중도에 대한 접근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됐을 시기가 아닌가요? 김종인 비대위도 있었고 그 연장선에서 지금 재보선에서 대응하는 것인데.

◇ 김종대> 그와 관련해서 끝으로 이 질문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될 것 같아요. 우리 박 대표님께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결국은 나 후보의 강점, 장점은 뭐라고 보십니까?

◆ 박성민> 그때 정치인으로서 엄청난 대중성이 이제 큰 무기죠. 이혜훈 의원이 그것 때문에 여러 번 좌절도 했고 그런데 그리고 선명하게 우유부단하지 않게 결정하는 게 장점이고요. 역시 한계는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든 정통 보수 입장과 강경 보수 입장을 하다 보니까 또 원내대표 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도 그런 자문을 많이 받다 보니까 어느새 내가 너무 중도로부터 멀리 온 거 아닌가. 말하는 중에는 홍준표 대표나 나경원 대표나 언뜻 비치는 것 같아요. 너무 많이 가서 중도로 오려고 본인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다.

◇ 김종대> 너무 멀리 왔어.

◆ 박성민> 너무 멀리 갔는데 여론조사로 나오는 거 보면 이게 내가 중도의 지지를 잃었구나라는 걸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 지금은. 국민의힘이라는 당도 그렇고 나경원이라는 개인도 그렇고. 그런데 좀 너무 멀리 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 김종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 박성민> 하니까 본선을 앞두고는 내가 가장 중간이다, 나 강경 보수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김종대> 단일화 전망에도 짤막하게 좀.


◆ 박성민> 단일화는 잘 모르겠어요. 국민의힘에서도 이게 단일화는 숙명적이다, 김종인 위원장도 그렇게 했고 나경원 의원도 지금까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저는 뭐 전망을 못하겠습니다.

◇ 김종대> 아직까지는 실현 가능성 가늠하기 힘들죠?

◆ 박성민> 그런데 여론조사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아직까지 국민의힘이나 나경원 의원이 중도층의 지지를 아직까지는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하는 거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 김민하> 탄핵 이후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인데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될 황교안, 나경원 체제일 수도 있었는데 그걸 못한 게 지금 자기의 경쟁력에도 족쇄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 김종대> 알겠습니다. 한 정치인의 영광과 시련의 역사 살펴봤어요. 후보로 본 한국 현대사. 이번 주에는 나경원 예비후보 현대사 정리해 봤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주신 세 분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 박성민, 김수민, 김민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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