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유예 기간 중 또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씨가 지난 7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10여명의 취재진이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인 황하나(33)씨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는 황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막 끝난 뒤였다.
"마약 투약 혐의를 인정하시나요?" "함께 투약한 지인들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 책임 느끼시나요?" "'바티칸 킹덤'을 만난 적 있나요?" "지인들 협박 혐의 인정하십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황씨는 딱 한 번 짧게 "인정 안해요"라고만 답을 하고 호송차에 올랐다. 법원은 "도망·증거인멸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같은 날 공덕동에서 380km 떨어진 경남 창원 경상남도경찰청은 텔레그램 채널 마약판매 조직 검거 소식을 알렸다. 총 96명의 일당 중 18명이 구속됐다. 공급·판매책 등 유통사범이 28명이나 포함된 국내 최대 규모 마약판매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국내 총책은 '바티칸 킹덤', 그리고 마약을 공급한 해외 총책은 '마약왕 전세계'였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마약왕 전세계' 지시 받은 바티칸 킹덤
"마약류 판매를 광고할 수 있는 텔레그램 채널을 개설해 줄 테니 마약류를 공급받아 판매하라."
29일 CBS노컷뉴스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간사 김도읍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바티칸 킹덤' 이모(26)씨는 지난해 5월쯤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41)로부터 마약 거래 제안을 받았다. 이를 승낙한 이씨는 같은 해 10월 27일 경찰에 붙잡하기까지 국내에 마약을 유통해왔다.
박씨는 2016년 필리핀에서 한국인 남녀 3명을 총기로 살해한, 이른바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필리핀에서 검거돼 재판을 받던 박씨는 2017년 3월과 2019년 10월 각각 탈옥에 성공했다. 두 번째 탈옥 후 도피해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 판매를 하는 중(CBS노컷뉴스 20.09.08 <[단독]'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 주범, 도피 중 은밀한 마약판매> 참고) 국내 유통책으로 바티칸 킹덤을 섭외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총책으로 지목된 바티칸 킹덤은 한국에서 동업자 3명을 모았다. 박씨는 '점조직' 형태의 하수인들을 통해 바티칸 킹덤 일당에게 수억 원대의 마약류를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9월 22일 새벽 2시, 바티칸 킹덤은 공범 A씨와 함께 서울 강남의 한 주택가 인근 편의점 앞에서 전세계의 마약 전달책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엑스터시 3천정과 케타민 2kg을 전달 받았다. 시가 4억 3천만원 상당에 달하는 마약류였다.
자료사진. 스마트이미지 제공
◇시가 총 7억 4000만원어치 마약 매수…'던지기', '차량 거래' 등차량에서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22일 오후 11시 40분쯤 바티칸 킹덤과 공범 두 명은 인천 중구의 한 지하철역 인근에서 마약 공급책을 차량에 태웠다. 공범이 운전하는 동안 바티칸 킹덤은 뒷좌석에서 공급책으로부터 엑스터시 985정과 케타민 550g 등 1억 2620만원 상당의 마약을 구매했다. 이 과정에서 노출을 막기 위해 바티칸 킹덤의 또 다른 공범은 차량을 뒤따라가며 망을 봤다.
공소장에는 '던지기' 수법(특정 장소에 마약을 숨기면 구매자가 직접 찾아가는 방식)도 등장한다. 바티칸 킹덤은 지난해 10월 27일 새벽 3시 15분쯤 마약 공급책으로부터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세탁소 1층에 마약을 숨겨놨다'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고 공범들을 보냈다. 공범 한 명이 망을 보는 사이, 다른 공범은 엑스터시 970정과 케타민 970g 등 1억 8430만원 상당의 마약류를 수거했다.
이렇게 매수한 마약은 다시 중간 판매책을 거쳐 재유통됐다. 지난해 10월 27일 새벽 3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승용차 안에서 바티칸 킹덤은 장모씨에게 엑스터시 1960정과 케타민 970g 등 총 시가 2억 3380만원 상당의 마약류를 제공했다.
이처럼 바티칸 킹덤 일당은 9~10월 3차례에 걸쳐 총 7억 4천만 원에 달하는 마약류를 매수하는 등 거래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는 수사기관을 통해 밝혀진 내용일 뿐, 텔레그램 마약 대화방을 5월부터 운영했던 점을 감안하면 드러나지 않은 규모는 더욱 클 가능성이 높다.
집행유예 기간 중 또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씨가 지난 7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바티칸 킹덤, 직접 마약 투약도…황하나와의 연결고리도 관심바티칸 킹덤은 마약 유통 뿐만 아니라, 지난해 10월 23일 강남구 한 호텔에 투숙해 직접 투약을 했다는 혐의도 드러났다.
당시 바티칸 킹덤은 호텔에서 한 여성에게 엑스터시 5정을 준 것으로도 파악됐다. 이 여성이 누구인지, 함께 마약을 투약했는지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4일 뒤인 같은달 27일 바티칸 킹덤은 서초구의 한 호텔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검거된 당일 새벽에도 필로폰을 투약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호텔에서는 필로폰 0.2㎖이 들어 있는 1회용 주사기와 필로폰 5.02g이 들어 있는 유리병, 케타민 0.3g이 들어 있는 비닐팩, 그리고 합성대마 1㎖이 들어 있는 카트리지 등도 함께 발견됐다.
바티칸 킹덤 검거까지 황하나씨의 지인인 A씨에 대한 수사가 단서가 됐던 것으로 파악된다. A씨는 지난해 황씨와 함께 마약을 투약한 혐의를 받는 지인 중 한명으로, 바티칸 킹덤에게서 마약을 전달받은 인물로도 전해진다.
황씨가 바티칸 킹덤을 직접 알았을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황씨와 주변인들의 대화가 남긴 녹취록에는 '바티칸'을 언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티칸 킹덤과 황씨, A씨가 지난해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는 전언도 알려졌다. 다만 황씨는 바티칸 킹덤과 만남 여부에 대해 '아니오'라고 부인한 바 있다.
여러 의문점을 규명해 줄 핵심 인물인 A씨는 지난해 말 극단적 선택으로 중태에 빠졌다가 최근 의식을 차린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조만간 A씨와 황씨가 어떤 경위로 바티칸 킹덤을 알았고, 마약을 입수했는지 등을 파악할 예정이다.
'마약왕 전세계'의 국내 총책이자 황씨 일당과도 연관성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바티칸 킹덤의 실체는 은밀한 마약 거래의 진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티칸 킹덤이 전세계의 지시를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최종 총책'인 전세계 박왕열을 하루 빨리 국내로 송환해야 전체 마약 거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박씨는 바티칸 킹덤이 한국에서 검거된 바로 다음날 오후 6시(현지시간) 필리핀 북부 라구나 주에서 붙잡혀 현지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한국 법무부는 박씨 송환 절차를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