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 잠잠했던 '관피아(관료+모피아')가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 초반부터 슬금슬금 금융권 협회장과 유관기관 수장 자리로 올라갔지만, 이제는 하마평에 거론되는 후보자들마저 관료 일색이다. 관피아라는 지적을 받기 때문에 관료 출신을 꺼려했던 분위기마저 180도 바뀌었다. 심지어 이제 퇴임 갓 1년을 넘은 금융위원장마저 강력한 후보가 됐다.
(그래픽=김성기 기자)
관피아의 신호탄은 손해보험협회장이 쏘아올렸다. 손보협회는 지난 회장 선거 당시에도 다른 협회와 달리 재무부 출신의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금감위·금융위원회 전신)이 수장으로 올랐다. 업계 안팎에서는 "역시 관료 출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번에도 금융 유관단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수장을 점찍었다. 정지원 한국거래소 이사장이다.
정 이사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7회로 1986년 당시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정통 관료 출신이다. 이후 금감위 은행감독과장, 금융서비스국장, 상임위원을 거친뒤 증권금융 사장을 거쳐 거래소 이사장이됐다. 금융당국 안팎에서도 "3관왕까지 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손보협회는 오는 13일 회원사 총회에서 그를 회장 후보로 단독 추천해 회장 선임 안건을 논의한다. 사실상 내정된 상태라 총회에서도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이지만,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를 거쳐야 한다. 다음달 21일쯤에야 취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생명보험협회에서는 진웅섭 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연합회에서는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다른 후보자들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지만 협회나 연합회 측에서 관료 출신의 '힘 있는' 후보자를 원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감독당국 수장들이 너무 이른 시점에 협회장이나 연합회장으로 옮기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따르고 있다. 진 전 원장은 2017년 9월 퇴임, 최 전 위원장은 2019년 9월에 퇴임한 바 있다. 이들이 감독당국 수장으로 있을 때 함께 일했던 임원들이 여전히 금융당국에 포진해 있다.
은행연합회(사진=연합뉴스)
한 금융당국 고위 임원은 "잉크도 안 말랐는데, 감독하시던 분이 피감독자를 위해 로비하는 기관으로 가는 것에 대해 말이 많다"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연합회의 경우 연봉이 가장 세고(7억원대) 업무가 그렇게 힘들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독 들이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감독당국 수장이 가면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3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기업은행도 모두 '금융 관피아'로 묶인다. 방문규 수출입은행장과 윤종원 기업은행장 모두 행시 28회, 27회 출신으로 재무부 등을 거친 이력이 있다.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고시 출신은 아니지만 금감위 부위원장 경력이 있어 관료 OB로 분류된다.
한국수출입은행(사진=연합뉴스)
한국거래소와 주택금융공사, 예탁결제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거래소 정지원 이사장이 손보협회장으로 사실상 자리를 이동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차기로 거론되는 인물은 손병두 금융위 전 부위원장이다. 이정환 주택금융공사 사장도 임기를 마친 뒤 거래소 이사장으로 갈 수도 있다는 하마평이 나오고 있는데, 모두 관료 출신의 모피아다. 이명호 예탁결제원 사장도 행시 33회 출신으로 여당 수석전문위원 경력이 있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관피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거세지면서 민간 출신이 한동안 금융권 기관장, 협회장으로 부상했지만, 정권이 바뀌자 또 언제 그랬냐는듯 관료 출신들이 모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몇년 전 만해도 관료 출신의 후보들이 거론되면 "절대 아니다"라고 부정하던 협회 등도 "실제로 일해 보면 힘이 센 관료 출신이 수월한 건 사실"이라면서 모피아를 원하고 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전직 관료를 협회장에 임명해 순리에 맞지 않는 일까지 추진하려다 보면 소비자 후생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금융협회장의 월급도 결국 소비자의 지갑에서 나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금융협회장 등의 자리에 모피아를 선임하는 건 문재인 정부의 나라다운 나라, 정의와 공정에 정면 배치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