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당 조수진 대변인(사진=연합뉴스)
막을 내리는 20대 국회와 양당구도와 대결지향을 예고한 21대 국회 사이에 '싸가지 정치'가 소환됐다.
21대 새내기 의원들의 의정연찬회가 국회에서 열린 20일 비례 초선인 미래한국당 조수진 대변인이 "무엇보다 '싸가지(싹수)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는 글을 기자들에게 보냈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의 일화를 꺼내면서다.
"문희상이란 정치인, 하면 단연 '봉숭아 학당'이 떠오른다", "'엽기수석'이란 별명으로 불린 유 총장은 졸지 않은 모습을 거의 뵌 기억이 없다"고 조수진 당선인은 썼다. 두 원로 정치인을 향한 표현은 조 당선인이 지어낸 건 아니다.
6선의 문희상 국회의장은 1990년대 초반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으로 이기택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이때 줄담배를 태우며 기자들과 격의 없는 문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기자들이 당 총재 집에 찾아가 매일 아침을 먹던 풍습이 있었다. 그 자리가 '봉숭아 학당'으로 불렸다.
이런 일화에 조수진 당선인이 덧붙인 말은 "'일방'이란 단어, '힘'을 확인해야 했던 '누더기 선거악(惡)법' 처리 등 지난 연말 국회 상황이 대단히 답답하게 느껴졌던 이유일 것 같다"는 거였다.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쓴 20대 국회 자체를 '봉숭아 학당'에 비유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왼쪽),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사진=윤창원 기자/연합뉴스)
유인태 총장은 '졸보'로 유명하다. 참여정부 정무수석이었던 그가 회의 도중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때도 졸았던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 본인이 직접 기자들과 저녁자리에서 "조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해명(?)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 모친이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던 것. 당시 그는 사형선고 직후 웃는 모습이 목격됐다. "'미친 X들, 이게 무슨 사형감인가. 동대문경찰서에 가서 따귀 몇 대 맞고 나올 일인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더라"는 게 그의 회상이다. 유 총장은 그때 "문희상 비서실장(참여정부 첫 대통령 비서실장)도 (조는 게) 만만찮았다"고 했다.
19대 국회 때 겪은 일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 개혁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되던 중 유인태 의원이 비공개 회의 석상을 가장 먼저 빠져나왔다. 국정원이 자체 개혁방안을 보고하는 자리였는데, 그는 "졸다 나왔다"고 했다. '개혁 의지가 보이던가요?'라고 묻자 웃으며 한 답변이 짧았다. "개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뼈있는 말로 주변을 자주 웃게 한 '졸음 대장'은 17대 국회의원 시절에도 일화 한 토막을 남겼다. 국회 의원회관 지하 목욕탕에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모 의원을 만났는데, 정계개편 얘기가 나오자 던진 말이 "정계개편 해야지. '싸가지 있는 당'과 '싸가지 없는 당'으로" 였다. 이 말은 친노-비노 이후 친이-친박 등 극한의 대립과 분화에서 종종 회자됐다.
조수진 당선인의 글에 실린 또 하나의 단어는 '백팔번뇌'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등에 엎고 과반 의석 열린우리당 초선 108명을 일컫던 말이다. 각자 개성이 뚜렸다하보니 붙은 별칭인데, '탄돌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사진=윤창원 기자)
21대 국회 첫 원내사령탑에 오른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최근 경선 과정에서 이걸 언급한 적이 있다. "제가 초선이었던 열린우리당 시절의 과오는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21대 국회에서 거대 여당 내 이견 분출과 당내·당청 갈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 트라우마'를 총선 압승의 여권이 반면교사로 삼는 분위기다.
조수진 당선인은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무엇보다 '싸가지(싹수)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대화와 타협,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라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싸가지'라는 말로 21대 국회에서의 각오와 바람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막말 논란이 일자 그는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애정을 담아 쓴 글"이라며 "전혀 비판의 글이 아닌데 몰아간다"고 했다.
이번 글은 문 의장의 특강과 유 총장 등의 인사 등 연찬회 행사를 앞두고 나왔다. 이날 열린 연찬회는 조 당선인 표현대로 "신입사원이 회사에 입사하면 오리엔테이션을 하듯 국회에 처음 들어오는 분들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당적과 관계없이 기자 시절 오랜 취재원이었던 두 분의 퇴장에 인간적인 아쉬움을 느낀다"고는 했다.
21대 국회 초선의원 의정연찬회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이 발언하는 모습.(사진=국회사무처 제공)
문 의장은 이날 연찬회 특강에서 "초심을 절대 잊지 말라. 그 초심이 마지막까지 간다"는 당부와 함께 "상대방을 헤집는 말로 관심을 끌려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공멸의 게임에 빠지면 안 된다"고 했다.
유 총장은 "축하 말씀 전하고, 바쁘실텐데 출석율이 좋다"며 "저도 92년 14대 초선으로 들어왔는데 그땐 이런 게(연찬회) 있었는지 몰라도 땡땡이를 쳤나보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