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질서가 근본적 지각변동을 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방역 성공을 발판삼아 다시 한 번 도약할 기회를 잡게 됐다.
하지만 모처럼 맞게 된 국격 상승 열기에 취해있을 뿐 정작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포스트 코로나'의 큰 그림을 아직 예견하기 힘든 탓이 크지만 지금 냉철한 미래전략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천금 같은 기회를 헛되이 흘려버릴 수 있다.
◇세계 질서 영원히 바꿔놓을 팬데믹
코로나19는 세계를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과 이후(AC·After Corona)로 나눌 만큼 역사적 의미를 키우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세계 질서를 영원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통찰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스페인 독감 때도 5천만명이나 희생됐지만 근본적 질서 변화는 없었다는 점에서 과도한 호들갑은 삼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포스트 코로나 체제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패권을 다툴 것이고 여타 국가들은 그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각의 관측처럼 G2의 방역 리더십이 실종됐다는 이유로 'G0'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10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기적으로 연결돼 타격이 훨씬 클 수밖에 없지만 보건·의료 또한 눈부시게 발달해 피해를 어느 정도 상쇄한다.
만약 백신이나 치료제가 예상보다 빨리 개발돼 사태가 조기 종결된다면 파장은 제한적이고 세계 경제는 오히려 V자 반등을 할 수도 있다. 주요 국가들이 사력을 다 해 연구개발에 나섰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세계 체제에 심대한 균열을 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때 거대한 조류였던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국 우선주의가 고개를 들고 미국마저 고립주의로 돌아선 세계 질서의 공백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코로나19는 무증상 감염이라는 은밀성, 저강도 증상에 따른 인간의 방심 등을 틈타 급속히 확산됐다. 코로나에 인격이 있다면 역대급의 교활함을 지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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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위기이자 기회…새 질서 주도할 유리한 위치세계화의 역류가 본격화된 시점에 발생한 코로나 사태는 탈 세계화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규범이 약화되고, 나부터 살겠다는 각자도생의 세상을 뜻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비우호적 환경을 맞닥뜨리게 됐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는 경제위기로 전이되며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과거 경제위기가 수요나 공급의 한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과 달리 이번 사태는 동시 병행적이며, 일부 국가·지역에 한정됐던 것과도 다르게 동시다발적이다.
안 그래도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판에 방역 장벽까지 높게 쌓으면서 경제 후퇴는 물론 국제 분업 구조마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올해 세계 무역이 최악의 경우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인 32%까지 급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할 일은 자명해졌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로서 세계화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19가 확산된 것은 세계화 때문이긴 하지만 발생 원인은 환경 파괴에 따른 기후변화에 있다.
앞으로도 바이러스 전염병이 빈발할 것으로 예상한다면 그에 따른 처방과 대책은 세계화가 아니라 기후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바이러스가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면, 그 세계적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세계화는 역행할게 아니라 보완·강화하는 게 이치상 맞다.
일각에서 세계보건기구(WHO)의 무능을 비판하지만 이 정도 초대형 사건에 대한 책임을 유엔 산하기구에만 묻는 것은 온당치 않다. 어차피 세계 정부로서의 유엔의 기능은 강대국 논리에 밀려 그 이전부터 원활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국은 무리한 봉쇄나 격리, 시민적 권리의 제한 없이도 방역에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지원 요청이 쇄도하는 진단키트 등 방역장비를 능력 한도 내에서 최대한 베풀며 코로나 국면의 최대 채권국이 됐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실현이자 미국을 포함한 다수 나라들에 '마음의 빚'을 지웠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포스트 코로나의 규범적 아노미 상황에 주도권을 행사할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모든 해외 입국자에 대한 2주간 자가격리 의무화 시행 첫 날인 1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개방형 선별진료소가 마련돼 있다. (사지=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전략 마인드 미흡…잘 준비하면 '감춰진 축복' 실현한국에 기회가 온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실현할 능력과 준비가 없으면 만사휴의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당면한 방역 대응과는 별개로 긴 호흡의 전략을 마련하고 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정부는 줄 잇는 외국의 칭찬에 잔뜩 고무됐지만 정부 내 누군가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외교부만 해도 교민 철수나 방역물품 지원 등 영사 관련 태스크포스(TF)만 만들 뿐 더 큰 차원의 전략 마인드는 찾아볼 수 없다.
통일부도 이참에 남북협력을 재가동할 절호의 기회로 삼을 법 하건만 기껏 한 일은 개성공단 마스크 아이디어에 퇴짜를 놓은 것이다. 좀처럼 볼 수 없던 순발력이었다.
방역 성공에 힘입어 한국의 외교 지렛대가 어느 때보다 커진 이 시점에 외교안보 당국이 한 일이라곤 높아진 국격을 만끽하고 자축하는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회도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 따라서 막연한 '국뽕'(맹목적 국수주의)보다는 차제에 우리의 실력을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고 채비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현 코로나 사태에서 한국이 선점한 지위는 우리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선진국들이 못한 측면이 크다.
미국과 유럽 등은 이 전염병을 중국 병(病) 쯤으로 여기고 방심하고 오만하고 오판했다. 좀 더 일찍 조심하고 대비했다면, 즉 기본만 충실했어도 막을 수 있는 사태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스트 코로나 세계 질서에서 우리가 독점적 우위를 행사할 근거는 취약하다는 얘기다. 자칫 말뿐인 기회이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들 나라에 지원하고 있는 마스크나 방호복은 물론 진단키트만 해도 범용기술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 생산시설이 없어서 문제이지 미국이 마스크를 못 만들 나라가 아니다.
최소한 백신이나 치료제를 먼저 개발해 명실상부한 방역 주권을 확보하고 'K 방역' 모델을 완성시키지 않는 한, 코로나가 준 기회도 신기루에 불과하다. 방역 모범도 좋지만 '범생이' 이미지로는 한계가 있다.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의 보다 현실적 측면은 경제에 있다. 크든 작든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잘 버텨내는 국가가 향후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강선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팬데믹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능력,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팬데믹이 종식된 후 경제가 회복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들은 팬데믹 이후 국제 관계를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과정에서 미·중 패권 쟁탈은 오히려 격화될 수 있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두 강대국 모두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고 국제적 리더십도 위기에 몰렸다.
상처 입은 두 거인의 싸움에 휘말려 미래 질서를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선택을 강요당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긍정적 측면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방역 모범국이 거저 만들어진 게 아니듯 한국의 총체적 국력이 부지불식간에 훌쩍 커졌음을 확인했다.
몇몇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의료·바이오 산업이 세계 수준을 넘볼 정도로 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 당국자는 국내 제약사들이 1주일 만에 코로나19 진단키트 개발에 성공한 것을 거론하며 "이처럼 빠른 속도는 4차 산업혁명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우리 스스로도 잘 몰랐던 능력"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 IT 등 비대면 기술 기반, 의외로 별 차질 없이 도입된 재택근무 방식 등은 향후 언택트(Untact) 경제에서 차별적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한국은 포스트 코로나를 '감춰진 축복(Blessing in disguise)'으로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